지난 토요일 밤, 한국 연속극 감상을 위해 가입해둔 웹사이트에서 영화 <하치 이야기>를 보았다. 리처드 기어와 애완견 하치의 사랑이 애틋해서 한참 웃다가 마지막에는 울음이 터질까봐 꾹 참느라 혼이 났다.(식구들 보기가 영 민망해서) 초등학교 교실에서 한 소년이 ‘영웅'이라는 주제 발표를 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칠판에 소년은 “내 영웅은 하치”라고 적는다. 아이들이 킥킥 웃는다. “하치는 할아버지가 기르던 개였습니다.”

아이는 이야기를 시작하고, 화면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인상 좋은 파커(리차드 기어)는 기차로 통근하는 음대 교수. 퇴근길에 역에 버려진 강아지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온다. 부인은 주인을 찾아 주던가 다른 곳으로 데려가라고 펄쩍 뛴다. 다음날 맡길 사람이 없어 할 수 없이 학교까지 개를 데려가는데, 친구인 일본인 교수 켄이 그 강아지가 4천 년 족보를 자랑하고 줏대가 강한 일본의 아키타견이라고 설명해 준다. 가죽 목걸이에는 하치(8)라고 일본어로 쓰여진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잔디밭에서 강아지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장난치는 파커를 바라보던 아내도 결국 하치를 받아들인다.

하치는 파커와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아내와 딸, 친구와 제자들에게도 다정하지만, 파커의 하치에 대한 사랑은 매우 각별하다. 그런 파커의 사랑에 답하듯, 철 들고 덩치 커진 하치는 기차역까지 파커를 따라와 배웅하고 퇴근 시각인 5시가 다가오면 어김없이 다시 마중을 나온다. 역전에서 핫도그와 커피를 파는 행상도, 표를 파는 승무원도, 가게의 흑인 여주인도, 그 역을 드나드는 행인들 모두가 하치의 그런 행동을 놀라워한다.

그러던 어느날 하치가 배웅 갈 생각을 하지 않고 한 자리에서 맴을 돌고 있다. 불러도 꿈쩍 않고 물끄러미 파커를 바라만 본다. 파커가 혼자 집을 나서자, 이번에는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노란 공을 물고 뒤따라간다. 역전에서 파커를 만난 하치는 노란 공 던지기 놀이를 하자고 조른다. 가지 말라고 붙드는 것 같다. 그날 파커는 강의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그걸 알 리 없는 하치는 밤늦도록 역전에서 파커를 기다리고 있다.장례식이 끝난 뒤, 딸 내외가 하치를 데려가고, 파커의 아내는 텅 빈 집을 떠난다.

하치는 딸 식구들에게 통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안절부절이다. 파커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하치는 열린 문틈으로 잽싸게 달려나간다. 철길 따라 하염없이 걸어 마침내 역을 찾아낸 하치는 파커를 기다리던 자리에 앉는다. 파커의 딸이 집으로 데려가도 하치의 마음은 역에만 가 있다. “나도 너처럼 아빠를 날마다 생각한단다. 너와 살고 싶지만 원한다면 보내줄게. 아빠를 기다리고 싶다면 가라.” 딸이 대문을 열어 주자 하치는 인사라도 하는듯 딸의 손등을 두어 번 핥다가 뛰어나간다.

하치는 그날부터 비가 오나 바람 부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주인을 기다린다. 주변 상인들이 챙겨 주는 음식을 얻어 먹고, 밤에는 쉬고 있는 기차 밑에 들어가 잠을 자고, 기차들이 기지개를 켜면 어김없이 역전으로 간다. 호기심을 느낀 기자의 취재로 “주인을 기다리는 충직한 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신문에 나가자 역으로 격려의 편지와 돈이 날아들기도 한다.

하치의 뒤에 서있는 나무에 잎이 달리고, 단풍 들어 낙엽지고 눈이 내리고를 반복하길 10년. 어느 겨울 성탄절 즈음에 하치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는다. 이어지는 장면이 눈물겹다. 리처드 기어가 마중 오고 한달음에 달려간 하치는 파커에게 매달리고 함께 뒹굴면서 회포를 푼다.다시 장면이 바뀌어 초등학교 교실, 소년의 말이 이어진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할아버지를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치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제겐 하치가 영웅입니다.”

하치는 실제로 1923년 일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한 살부터 동경제국대 교수인 우에노 히데사부로 박사가 하치를 길렀으며, 당시 동경 시부야에 살면서 전차로 출퇴근하는 우에노 박사를 하치는 날마다 배웅하고 마중했다고 한다. 그렇게 1년 5개월이 흐르고, 1925년 박사는 강의 중 돌연 쓰러져 급사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모르는 하치는 그날 밤 늦게까지 박사를 기다렸고,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10년을 한결같이 시부야 역의 인파 속에서 박사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 하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동물 애호협회와 일본견 보존회 유지들은 뜻을 모아 1934년에 동상을 세웠으며, 1935년 하치는 사람들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죽었다고 한다. 전쟁 중 금속 공출로 인하여 처음 동상은 사라졌지만, 지역 유지들이 다시 만들었으며, 하치와 우에노 박사가 잠들어 있는 아오야마 묘지를 찾는 이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실화도 감동적이지만, 연기 끝내 주는 개와 배우들 덕분에 영화역시 실감난다. 딸의 결혼을 앞두고 파커 교수는 사윗감에게 딸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파커는 “살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지금의 그 마음을 잊어버리지 말게나”라는 조언을 해주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심장마비를 일으키던 날, 강의실에서 피아노 연주를 들려 준 뒤 그 곡을 작곡, 연주한 사람이 녹음을 거부했다는 말을 학생들에게 들려 주는 장면 또한 기억에 선명하다. “연주 당시의 감정이 녹음기에서 재탕 삼탕 흘러나온다면...”파커는 연주회장에서의 청중과 연주자의 교감을 언급하고 싶었던 것일까?

다음날 종려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파커와 하치의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이 갑자기 생각나 기도 시간에 한참이나 울었다. 할머니와 아버지와 엄마, 남편과 아이들, 친구와 교인들, 스쳐 지나온 많은 이웃, 길렀던 개까지,.. 그 누구와도 가슴 설레고 조건 없는 사랑을 느낀 시간들이 있었다는 게 새삼 기억나서 울었다. 너무 쉽게 잊어 버린 사랑의 편린들이 줄줄이 떠올라 울었다. 죽음으로부터, 인간적인 한계 상황으로부터, 그리고 죄로부터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도 아파서 슬피 울었다. 참으로 못 말릴 나만의 영화 감상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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