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상애 교회 (2)

“맥켄지 목사님은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셨지요.”
“여러분 내가 아들이 없어서 내 후임을 물려주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내가 꼭 약속할 것은 내게 딸이 셋 있는데 공부시켜서 한국 사람에게 보내겠다.”
“결국 나환자 사업은 못했지만 맥켄지 선교사님의 딸들이 부산의 일신 기독 병원을 설립하게 된 거죠.”
“추마전 선교사님도 아시겠네요?”
“알고 말고요. 맥켄지 선교사님의 후임으로 1938년도쯤 오셔서 일하셨는데 2년도 채 안 되어 추방 명령을 받았습니다. 성품은 온유하고 순진하셨는데 일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면 겁을 내는 어른이셨어요.”
사람 마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악조건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는 새로운 기쁨으로 변하는 것일까?
이성곤 장로를 보면 그 어떤 나쁜 상황도 신앙 안에서는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 옛날에 나병에 걸렸으니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어요. 나병이 전염병이니까 이웃, 친척들 모두가 기겁을 한 거죠. 저 혼자 고통 받는 것은 그런대로 견딜 만한데 저 때문에 가족들이 따돌림과 멸시를 받는 것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병으로 인해 외길 인생을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준비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으니까요.”
“치료는 어떻게 하셨나요?”
“맥켄지 선교사님이 대풍자라는 열매를 가지고 대풍자유를 만들어 효과를 보았지요 처음에는 먹었는데 눈의 시력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맥켄지 목사님이 연구를 해서 주사용으로 만들어 주사를 맞았는데 나병이 잡히데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꼭 주사를 맞았습니다. 맥켄지 목사님은 우리만 돌보신 것이 아닙니다. 마산, 창원, 김해, 울산, 밀양, 진주, 거창 등 경상도 지방 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나환자들을 대풍자유 주사로 치료해 주었어요. 일주일에 꼭 한 번씩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습니다. 치료는 무료지만 그러면서 예수를 믿도록 한 거죠. 치료된 많은 분들이 간호사로 일했는데 남자 간호사도 있었어요.”
“남자 간호사요?”
“그래요. 지금도 생각나는 이름이 있어요. 김영봉, 김수영, 황원술 등인데 병이 나은 후 간호사가 되었지요.”
이 장로는 당시 상애원 안에는 명신학교가 있어서 낮에는 환자 자녀들이 공부하고 밤에는 나이 먹은 사람을 위한 성경 공부와 문맹 퇴치를 위한 공부를 가르쳤다고 말했다.
현재 상애원에는 1천 2백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90% 이상이 기독교 신자이다. 상애원에는 상애교회 외에 오륙도 천주교회와 용호제일교회가 있다.
“이 장로님의 신앙은 초대신앙입니다. 새벽 4시 전에 나오셔서 6시, 7시까지 기도하시고 아침 식사를 하신 후 가정 예배를 드립니다. 오후에는 기독교방송의 새롭게 하소서를 들으시고 오후 4시쯤 교회에 나오셔서 한 시간 정도 기도하시고 저녁에 내외분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루의 일과입니다. 판단이나 기억력이나 흐트러짐이 없고 안경을 끼시지만 돋보기 안경 하나 덧붙여 예배 때마다 성경구절과 찬송을 반드시 찾아서 읽습니다. 우리 장로님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상애교회 12대 이상붕 목사는 때론 목회자인 본인도 도전과 자극을 받을 때가 많을 정도라고 했다.
“인도네시아에 2년 동안 선교사로 나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곳 상애교회에 오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라고 확신합니다. 가족들이 외국생활을 하다 보니까 인간 이해에 대한 폭이 넓어져 쉽게 오게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 성도들이 773명인데 30%는 자녀들입니다.”
인터뷰를 마친 우리 일행은 이성곤 장로 집으로 자리를 옮겨 못 다한 얘기를 하기로 했다. 이 장로의 집은 교회 지척에 있지만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기자는 이 장로의 집까지 가면서 부축하여 길잡이가 되어 주려고 했으나 “괜찮아요”하며 취재진보다 앞장서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휘적휘적 내려간다. 상애원에는 영혼을 울리는 기도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거동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다 새벽 5시에 시작되는 예배에 참석해 하루를 연다. 힘찬 기도소리, 과연 무엇을 감사할 수 있는 것인가. 이들은 질병을 고난이 아니라 은혜라고 말한다. 질병을 통하지 않았다면 어찌 주님의 은혜를 알았겠느냐고 말한다.
예배당에는 지팡이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참석하는 사람, 두 손 두 팔이 없어도 휠체어를 타고 예배에 참석한 중년 남성의 환한 미소가 평온함을 준다.
이상붕 목사는 세월이 변한 만큼 이제 상애원은 단순한 시설이라기보다 선교와 구제에 앞장서는 선교 센터로 거듭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60~70년대의 장로 20명이 그 중심 축이 돼 기관별로 해외선교는 물론 인근의 불우이웃이나 소년소녀 가장 등 각종 복지 단체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래서일까, 기자는 상애원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취재수첩에 이런 글을 적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부산을 상징하는 오륙도를 내려다보고 있는 환경친화적인 상애교회는 용호동 지역개발에 따라 2004년 3월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용수리 1047-2에 이전하여 3,000평의 대지 위에 다기능적인 아름다운 현대식 예배당과 65세대의 주택을 건축하고 새 터전에서 믿음이 뜨거운 교회의 전통을 이어가기로 이상붕 목사는 다짐하고 기도하고 있다.

편집자 주: 필자의 저서『내 사랑 코리아』를 $10에 구입할 수 있다. 문의는 303-755-7862,  kilwonpi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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