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 비유에서 탕자는 작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큰 아들이 탕자라고도 하고, 심지어 아버지를 탕자라 하기도 합니다.

제2의 탕자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지도 않고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한 큰 아들이 왜 탕자입니까?
작은 아들이 육신의 탕자라면 큰 아들은 정신의 탕자입니다. 큰 아들은 사랑보다 이해타산으로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바라고 착한 아들 노릇을 해왔던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몸으로 아버지를 떠났다면, 큰 아들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보다 세상 향락을 더 사랑했다면, 큰 아들은 아버지보다 염소 새끼에 더 마음을 쏟았습니다.
윌리엄 템플 대주교는 “오늘의 현상은 마치 어떤 장난꾼이 상품의 가격표를 마구 바꾸어 붙여놓은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제1의 탕자들은 싸구려에 비싼 값을 지불하기 위해, 소중한 것을 버리고 아버지 집을 가출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말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 55:2).
그러나 집안에도 탕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큰 아들의 헌신이 아버지를 향한 참된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을 향한 탐욕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 과연 누가 더 아버지를 실망시킨 탕자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의 교회를 위기에 빠뜨리는 장본인은 문밖의 탕자들보다, 상속자로 자처하며 집안에 사는 탕자들입니다.
그들은 아버지께 충성한다지만 유사시에는 아버지의 사랑보다 염소새끼를 택합니다. 열심히 드리는 기도는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부리는 도구입니다. 바치는 헌금에는 염소새끼로 돌아오는 대가를 바라는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사랑의 계명을 지킨다고 봉사하지만 이웃에게 송아지가 돌아가면 참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오늘 우리는 아버지 집에서 상속자의 명분을 지키는 것을 자랑할 만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나의 기도와 헌신과 봉사의 밑바닥에 염소새끼의 꼬리가 꿈틀대지나 않는지 살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작은 아들의 어리석음이 아버지의 사랑보다 세상 향락을 더 사랑한 것이라면, 큰 아들의 어리석음은 아버지의 사랑의 깊이를 깨닫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아들은 제2의 탕자가 된 것입니다.

제3의 탕자
존 낙스 교수는 아버지를 사랑의 탕자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가출하는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 주었고 기다리던 아들이 돌아오자 최고의 대우를 하였습니다. 큰 아들이 불평할 만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이런 사랑의 탕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모든 일꾼에게 같은 노임을 주는 포도원 주인, 선한 사마리아인, 길바닥, 가시밭, 돌짝밭 가리지 않고 씨를 뿌리는 농부, 오지 않는 손님 대신 거리의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잔치집 주인이 모두 사랑의 탕자입니다.
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부을 때 제자들은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차라리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옳지 않으냐?”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향유를 낭비한 행위에서 하나님 사랑의 탕자 성을 보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야말로 어리석고 사치스럽고 낭비적인 사랑의 극치입니다. 무신론자 사무엘 버틀러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은 얼마나 유쾌한 악마성을 가진 사랑이냐”고 꼬집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속적 사랑의 폐해를 얼마든지 봅니다. 사랑 때문에 애인을 칼로 찌르고, 독약을 먹여 저승길의 동반자로 삼는 악마적 사랑을 목도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원치 않는 사람과 장소를 찾아가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치유와 건강과 도움이 거기 깃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때로 하나님을 사람인양 착각하여 뇌물을 바치거나 거래를 하려는 어리석은 짓을 합니다. 이것은 종교의 타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탕자적 사랑을 깨달아야 기독교를 바로 알 수 있고 제2의 탕자로 전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배신하고 가출한 제1의 탕자들은 오늘도 도덕적 발광시대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생존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탕자도 경계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의 탕자성 앞에서 우리는 제1과 제2의 탕자성을 극복하고 참다운 상속자의 지위를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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