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영(위스칸신)

한국에 갈 때마다 평준화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분위기를 자주  접합니다. 어느 해 겨울, 주일예배를 드리려고 커다란 교회에 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온 교회 여성도들이 털 달린 코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교회 주변 골목골목이 털외투의 물결이었습니다. 그날 그 시각, 그 교회 여성도들은 털 달린 외투로 평준화되어 있었습니다.
다음날 친구를 만나러 백화점 앞에 갔습니다. 아이들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까만 머리여서 뒷모습으로는 내 친한 친구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며칠 뒤 전철에서 나이 든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자, “나하고 별 차이도 없는 분 같은데” 하면서 염색 안한 내 머리칼을 힐끗 쳐다보던 할머니의 머리칼도 새카맸습니다.
지난 달, 한국에 갔더니 날씬한 아가씨부터 손자를 보았음직한 할머니들까지 몸에 딱 붙는 옷들을 입고 있었습니다. 남자들도 하나같이 날씬해 보엿습니다. 넉넉한 스웨터와 손주를 감쌀 만큼 풍덩한 자켓을 입은 할머니를 한 분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공항에는 젊게 차린 할머니 예닐곱 분들이 3살 미만의 손주들을 데리고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애기, 미국 시민권자에요?”라는 말들이 들려왔습니다. 미국 유학 간 아들딸 아이를 키워서 데려다 주는 할머니 역할로 평준화된 모양이었습니다. 꼬마들의 서투른 인사도 “사랑해, 친구야”하면서 끌어안는 것으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평준화라는 말은 고교평준화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교육 분야에서 빈부 격차를 고루어 보자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일류학교에 몰리는 인구가 분산되기는 커녕 오히려 부자학군을 재조성하고 부동산값까지 좌우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 있는 교포들은 뉴스에 관한 한 평준화가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듣는 대로, 아는 대로 다 전하려들고 평가까지 곁들여 나누어 가지므로, 국내 뉴스는 물론이고 전세계, 아니 교회 뉴스까지 공통적으로 알게 됩니다.
문득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평준화되면 어떠할까라는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각 교회나 노회나 총회에서 빚어지는 어지럼증은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체를 이끄는 믿음 좋은 사람을 찾아야 할 때, 리더십 기능만으로 우두머리가 되려는 사람들끼리의 경쟁이 문제될 것 같습니다.
이런 단순한 가정만으로도 목사님과 직분자들, 또 평신도들 사이에 믿음의 격차는 당연히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질서를 다스리고, 가르치고 배우며, 닮아가야 하니까...... 일단 이 시점에서 엉뚱한 가정을 멈추기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속자로 주셨으며 정하신 뜻대로 믿음을 주셨다는 것만 평준화되어 있을 뿐, 우리는 주신 은사를 따라 최선을 다해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차별화되려고 경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다르게 지으셨고, 주신 믿음의 분량도 다르므로 믿음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신 믿음을 키우고 다듬는 과정에서 생기는 볼썽 사나운 모습도 차별화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보였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처럼, 우리 역시 온힘을 다해 노력해야 하며 믿음의 평준화를 기대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일반적인 기준에 편승하여  한 자리에 머문다면 아마 한 달란트 받은 게으른 종이 될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이 차이나는 것은 타당하며, 바른 믿음으로 그 차이를 조화시켜 불협화음이 생기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평균치의 믿음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힘껏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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