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중에 욕심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어떤 모양으로든 욕심이 있기 마련이다. 이 욕심이란 것을 좀 세련된 말로 야망이라고 바꿔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자신에게 젊음이 있고 이제 앞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의 가능성이 많이 열려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꼭 해보고 싶은 것, 한 번은 이뤄 보고 싶은 꿈, 이런 것들은 누구에게나 다 있게 마련이고 특히나 요즘 세상에는 은근히 이런 욕심들(?)이 장려되고 있다. 물론 욕심이라는 것이 단순히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위치나 명예에 대한 욕망일 수도 있고, 또 뭔가를 이루고 싶은 성취욕으로도 표현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어떤 부분이든 이런 욕심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들에게 이런 욕심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말도 아니고, 또 아무 욕심 없이 그냥 소극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말도 아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무엇에 대한 욕심을 가져야 하며, 어떤 것에 대해서 욕심을 버려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보면 부자 관원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 관원은 젊은 사람이었고 야망이 있었던 사람으로 보인다. 이미 젊은 나이에 관원이 되었고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바로 이 젊은 관원이 예수님께로 와서 영생에 대해서 물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람과 주님과의 대화로 볼 때 율법적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아무런 흠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불의를 행하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나 종교적인 열심도 있던 사람이었다. 아마 주님께 영생에 대해서 물었다기보다는 자신의 선한 행동, 도덕적, 종교적인 삶으로 이미 영생을 얻었음을 주님께 확인하려 했던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자랑스럽게 말한 선한 일들에 대해서 칭찬도 하지 않고 단 한마디의 말씀을 그에게 하셨다. 그 청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 청년 관원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많은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근심하면서 돌아갔던 것이다.

그는 율법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율법의 말씀을 자기의 선을 이루는 데에만 적용할 줄 알았지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신앙이 의가 되어서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왔다. 늘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은근히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또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의 행복과 성공을 추구해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청년의 신앙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야말로 껍데기 신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무엇을 붙들고 살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는가? 도대체 무엇에 만족하고 있으며 내 신앙의 중심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일치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정말로 우리들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우리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살아가느냐는 말이다. 우리들의 야망, 욕심이 나에게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풍족한 삶, 편안한 삶, 그야말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보이는 그런 삶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신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늘 입으로만, 겉모습으로만 경건한 척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의 핵심이 되는 사랑과 희생을 행하며 살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욕심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그 욕심의 동기가, 그 욕심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를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은 분명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그 사랑과 희생이 정말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들은 이 세상 가운데서 살아간다. 열심히 일하며 신앙생활을 한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와 교회에서 여러 모양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내 인생의 목적, 삶의 방향, 내가 반드시 잡아야 하는 것을 바로 잡고 있느냐는 말이다. 혹시라도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지는 않는지, 내 육신의 삶을 위해 예수를 한 방편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지 확실히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평생을 교회 다니면서도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정말 그럴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많이 보아왔다.

주님은 우리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고 그저 죽지 않을 만큼 불쌍하게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고 계시지 않는다.  우리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희생하고 나누는 그런 삶이 복된 삶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들은 예수로 다시 산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주님만 좇고 이제 그 십자가의 길을 가기로 했으면 붙잡을 것을 확실히 붙잡고, 버려야 할 것, 포기할 것은 확실히 포기하라는 말이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다면 분명히 포기해야 할 것들이 있다. 베드로와 형제들은 자신의 생업이 달려 있던 그물을 내려놓았다. 마태는 세금을 걷다가 말고 그 자리를 박차고 주님을 좇았다.

우리들의 기득권은 무엇인가? 이것만은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붙들고 놓지 않을 때도 있고, 아직도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세상에 눈길을 보내고 있다. 아니면 세상이 좋아서 주님만 잡고 제자의 삶을 살기를 망설이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예수를 붙잡고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그 사랑과 희생, 섬김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분명한 것, 확실한 것은 예수다.

다른 것 붙잡으면 죽는다. 예수는 내 삶의 방편이 아니라 목적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근심하면서 예수를 포기했던 어리석은 청년 관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고 주님만을 따르는 참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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