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숙

 

가슴 속에서 맑은 감성이 솟아나 한 편의 시가 읽고 싶어질 때면 시편을 꺼내 보곤 한다. 가슴 속이 텅 비어 허전할 때도 시편을 펼쳐든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워 찬미하고 싶을 때도 시편을 읽고, 나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그 분의 손길이 느껴질 때도 시편을 읽는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색다른 느낌으로 시편을 펼쳐들었다. 무심코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훑어보다가 시편 묵상집 <노년... 희망이 있습니까?>라는 책을 본 순간 나도 이제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다는 생각이 문득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희망은 필요하다. 나름대로 열과 성을 다해왔던 모든 활동을 멈추고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사회의 뒷전으로 물러나야 하는 노인들에게는 내일에 대한 희망, 특히 영원에 대한 희망은 더욱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희망이 적으면 적을수록 고통의 원인은 증가된다고 한다. 나에게도 노년은 금방 닥칠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살다가 비로소 깨어났다. 시편을 묵상하며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노년은 하느님 곁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단계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는 이 책에 눈길이 멈춘 것은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노년기를 맞이하고 있는 저자의 묵상이 유난히 돋보이며 깊은 공감을 자아내는 대목이 몇 군데 있다. 그 하나가 인간은 살기 위해서, 그리고 죽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하는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만 생각할 뿐 죽음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일부러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인 것을. 우리 삶에서 ‘살다’와 ‘죽다’의 두 단계만 생각하면 잔인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저자는 그 뒤에 또 하나의 단계인 ‘살다’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을 희망에로 인도한다.
또 하나는 우리가 살도록 불림을 받은 것처럼 죽도록 불림을 받았으므로 죽는다는 것은 하나의 소명일 수 있다고 한 부분이다. 우리 모두는 어느 한 순간에 죽거나 아니면 서서히 죽어간다. 노년은 그 끝자락에 서서 많은 시간과 공간을 뒤에 남겨두고 마지막 문을 열고 나간다. 이것을 저자는 부르심, 곧 개인적인 소명이라 부르고 있다. 깊은 공감을 자아내는 대목이다. 나는 머지않아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행을 준비해야 하리라.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것. 생각해보니 노년은 느리거나 재빠른 쇠퇴이며 정지할 곳이 없이 내려가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올라가기 위해 내려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대한 도약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려가는 것은 사실 올라가는 움직임의 일부분일 수 있다.
그는 또 모든 죽음은 난폭하다고 말한다. 힘이 점점 빠짐으로써 육체적인 폭력을 체험하고, 강제로 은퇴해야 하고 정면에 나서지 못하는 사회적인 폭력을 체험하고 기억과 관심을 잃어 가는 정신적인 폭력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나무에서 가지가 잘리는 것처럼, 보이는 삶에서 멀어져야 한다. 그렇게 떠날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저자는 우리의 삶에서 때로는 방향을 잃고 장애물에 걸리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가 걸은 길은 발전적이었고 상승하는 것이었다고 위로해준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후회했던가.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위로는 소중한 깨달음을 안겨준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아직 올라가야 할 길이 남아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 노년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남아있고, 아직 달려야 할 길이 남아있고,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우리가 그 동안 쌓은 지식과 얻은 능력, 그리고 체험을 통하여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계획을 짜고 우리에게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행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계획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발견하고 정복해야 할 세계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노년이 무력하거나 쓸모 없는 시기가 결코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귀한 시간이 노년에게 주어진 것은 축복이다.
아이들은 많은 것을 보고 감탄한다. 그러나 노년은 감탄할 것이 그들보다 훨씬 더 많다. 소년기와 청년기와 장년기를 지나온 노년기에는 소중한 것들이 보물창고에 넘치도록 가득 담겨있기 때문이다. 육체는 비록 쇠퇴해 가나 영원히 늙지 않는 마음은 지나온 시절의 그 모든 것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부유한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마터면 이렇게 아름답고 풍부한 노년기를 한숨지으며 맞이하고 보냈을 텐데 다행히 이 책 덕분에 향기롭고 윤기나는 노년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숨겨진 귀한 보물을 찾아낸 것 같아 행복한 느낌마저 든다.
시편의 저자처럼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8,4)” 묻고 또 물으면서 다가오는 노년을 후회 없이 잘 준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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