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ll Group Ministry 3

 “20세기에 사는 우리는 아주 중요한 어떤 것을 잃고 있다. 우리가 그때로 돌아가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했던 것을 단순히 모방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 모임의 본질적 성격은 이 20세기에도 적절하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필자는 교회를 단념해 버린 그리스도인들과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마음에 두고 있다. 그들은 여기에서 자기들이 찾아오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밝히 알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필자처럼 매주일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일들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지구상의 많은 소그룹 모임의 사람들에게 이 작은 책을 바친다.”(초판 서문 중에서)

『1세기 교회의 예배 모습 Going to Church in the first century』(여수룬 출판사, Robert Banks 지음)이라는 다소 흥미로운 제목의 이 책은 신학 이론서가 아니다. 또한 당시의 모습을 ‘극화’하여 서술한 방식이 특이하다. ‘예배 모습’이라 하였는데 오늘날의 공 예배보다는 ‘소그룹’ 모임의 원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한글 번역 문체가 좀 오래되고 고어적인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내용을 좀더 리얼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이 책을 바탕으로 간단한 촌극(skit)이나 드라마를 꾸며 보아도 좋겠다.

먼저 배경 설정과 등장 인물을 간단히 돌아본 다음, 원문을 부분적으로 소개하면서 줄거리를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배경은 1세기 중반, 다른 곳에 비해 널리 알려진 로마이다. 아굴라(남편)와 브리스길라(아내)가 손님 대접 잘하기로 소문난 부부로 나오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의 지도자인 셈이다. 주인공은 초대를 받은 이방인 푸블리우스이며, 그가 방문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소감 형식의 글이 전개된다. 이외에 디아스포라 유대인,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등장한다.

“아굴라가 나타나자 나의 친구들은 그가 문까지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대신에 그를 만나려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관습적인 것보다는 다정하지만 통상적인 포옹과 남자들 사이의 입맞춤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당신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라고 아굴라가 충심으로 인사했다. ‘당신에게도’라고 글레멘드가 대답하면서 ‘여기에 다시 오게 되어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와의 상면 21쪽) 

처음 만나면서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이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버선발로 나가 맞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또한 돌아오는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진다. 로마의 1세기, 당시 상황에선 남자들 사이의 입맞춤 인사가 파격적인데 그만큼 반가운 만남을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들어온 가족들과 함께하는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대화가 꽤 진행되었을 때 두 명의 손님이 더 왔다. 한 사람은 비싸게 보이는 가벼운 긴 겉옷을 입은 출중하게 보이는 신사이고, 함께 온 다른 사람은 수수하고 짧은 옷을 걸친 그 신사의 종이 분명했다. 그 두 사람의 명백한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굴라 부부가 그들에게 인사하는 데 거의 차이가 없음에 나는 놀랐고, 조금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이 들어서자 갑자기 아이들이 쫓아 나가더니 그 종을 둘러싸고는, ‘루시아, 루시아’하고 불렀다. 그러자 그는 짐짓 겁을 주며, ‘그래, 그래. 야만인들이 로마에 쳐들어왔다고 나에게 말하지 말아라!’라고 말했다.” (23~24쪽)

주인과 종이 한 자리에 앉는 모습으로 이 역시 로마의 1세기 상황에서 상상할 수 없는 크리스천들만의 모습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선 빈부나 지위의 차이에 상관없이 한 공동체를 이루고자 노력한다. 요즈음의 소그룹은 직업, 나이, 성의 유사성 등을 고려해서 구성되지만, 여전히 나와 다른 사람과 한 공동체를 이루는 정신을 보여 준다.

“우리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브리스가(혹은 모든 사람이 더 부르기를 좋아하는 이름인 브리스길라)가 우리의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푸블리우스 씨는 첫 번째 식탁의 가운데 소파 맨 위편에 앉으시겠어요?’하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실수한 줄 알았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정상적으로 하면 가장 중요한 손님에게 권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요?’하고 나는 그 자리에 가서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충실하게 나의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지위로 말하면 아리스도부르스가 나의 자리에 앉아야 마땅한데, 유오디아 왼편의 좀 덜 중요한 손님용의 소파에 그의 종과 나란히 앉혔다. 나는 그가 이 예의에 어긋난 두 가지 처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나를 살펴 보았으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여러 식사 초대에 가 본 경험에 의하면, 이런 경우는 그가 항의하고 이 자리를 나가 버릴 만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성만찬에 참여함 25~26쪽)

오늘날 소그룹에선 VIP, BEST 등의 명칭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방문했을 때 각별히 환대한다. 때로 초대받는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는 정성까지 보인다. 1세기 교회에서 자리 배정을 통해 최고로 모시는 장면이다. 오늘날에는 평소 하나의 빈 의자, 빈 자리를 두고 기다려온 그 사람이 왔을 때  그들이 바로 주인공이 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그런데 우리가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아굴라는 그의 아내가 자기 앞 식탁에 가져다 놓은 둥근 빵덩이를 들더니-보기에 그 빵은 빵집에서 사온 것이 아니고 집에서 만든 것 같았다- 축사하겠다고 하였다. 아마 그들의 신에게 올리는 일종의 제사인 것 같았다. 우리 로마 사람들은 가족이 먹는 음식과 음료를 조금 남겨 두었다가 식사를 마친 다음 그것을 받아 달라고 신들에게 바친다. 유대인들은 이를 달리하여 빵을 떼고 어떤 기도를 한 다음에 식사를 시작한다고 나는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이보다 더한 것이다. 빵의 일부를 그들의 신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참석한 사람들에게 아굴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을 대신해서 어떤 것을 제공해 주셨음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즉 그들의 하나님의 독생자가 그들이 살도록 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29쪽)

오늘날의 소그룹 모임에서 성만찬을 거행할 수 있는가? 신학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장면이다. 보통 공 예배에서의 목회자 집례로 제한하는데, 1세기 교회의 경우, 가정 모임이 곧 예배요, 성직자에 대한 직분이 생겨나기 전이었던 것이 오늘날과 다른 점이다.   

“브리스길라가 조금 후에 돌아왔을 때는 나의 행운을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최근에는 거의 고기를 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기를 좀 먹고 싶은 차였다. 고기는 항상 공급이 달렸고, 상태가 가장 좋은 때는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그런데 여기에 여러 가지 고기가 큰 접시에 담겨서 각 식탁에 나오고 또한 구색을 맞춘 야채 접시도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컨대 그들은 일주일 내내 오늘을 위해서 이것들을 아껴둔 것 같았다. 놀랍게도 또 나에게 제일 먼저 그 고기 접시가 오는 것이었다... 내 맞은 편에 있는 아리스도부르스가 자기 종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음식을 덜어 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과 정확히 똑같은 종류를 똑같은 분량으로 덜어 놓는 것이었다. 나는 해방 노예일지라도 특별한 손님보다는 덜 좋은 음식과 술, 그리고 그릇까지도 다른 종류에 주는 것을 보면서 자라왔다. 더구나 노예들은 일반적으로 식당 밖에서 식사를 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는 이런 일은 아직 흔한 것이 아니었다.”(함께 교제를 나눔 36~37쪽)

예배와 식탁 교제가 분리된다기보다 식사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일주일 내내 한 번의 식사 모임을 위해 준비하는 모습, 나아가 최고의 음식을 대접하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대화가 작은 단위로 이루어져서... 참석해 있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모임의 참여도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참석해 본 만찬에서 종종 손님들은 만찬 중에 자신들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는 상관없이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편지를 쓴다든지, 옆에 있는 사람과 장사를 하는 일도 있고, 어떤 때는 순서가 바뀌는 사이에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이 모임의 사람들은 예의바르게도 음식이나 포도주 남은 것을 바닥에다 버리길 삼가는 것도 관찰할 수 있었다...

더구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 모임이 바람직한 것을 많이 남겨 주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한, 그때까지 일어난 일 중에서 종교적이라는 것은 거의 없었다. 우리가 기대하는 의식적인 예식은 차치하고서라도, 제사장도 한 사람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것보다 더한 진정한 어떤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종교적인 형식에 있어서 자유로움 43~44쪽)

모임에는 대화가 있고, 이어서 찬양이나 성경을 배우는 시간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런 순서들이 종교적인 의식이나 형식과는 상관 없이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가이오가 일어나더니 할머니 마리아에게로 걸어갔다. 그녀의 곁에 서더니, 자신의 손을 그녀의 머리에 앉고는 다른 사람을 불러 그녀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치유해 주시도록 그녀를 대신하여 요청하였다. 지난 주간 동안 많이 낫게 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며 완전히 나을 수 있도록 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모임의 다른 지체들의 삶의 여러 부분을 위한 각종 기도를 시작하는 신호가 되었다. 이 일이 계속되는 동안에 나는 조금씩 졸렸던 것을 고백한다... 글레멘드도 여러 시점에서 이렇게 느끼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는 다소 못 참겠다는 듯이 슬리퍼를 질질 끌며 이리저리 다니면서 기도에서 물러난 듯이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러자 드디어 아굴라가 모두가 다 아는 짧은 작별의 노래를 하자고 제안함으로써 그 일을 마무리지었다. 무리는 노래를 불렀고 모임은 끝이 났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끝이 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만찬 후의 여가 58쪽)

기도로 모임을 마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방문자 푸블리우스는 모임이 예상과는 달랐는데, 그러나 즐거웠다고, 다음에 초청이 있으면 아마도 응할 것이라는 소감으로 마무리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 하자”(히브리서 10:24-25).

1세기 교회의 본질이 오늘날의 교회에도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각 교회의 소그룹 모임을 통해 주님 안에서의 참 교제가 이루어지고, 특별히 잃어 버린 한 영혼이 예수님을 만나는 귀중한 모임이 되기를 기도한다. 

(참조 -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의 다른 책 『바울의 공동체 사상』,『교회 또 하나의 가족』등의 저서를 통해 소그룹 사역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안내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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