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짜리 교회(38)

이제 말라기 3장에 등장하는 “도둑질”에 대해 살펴볼 차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둑질을 한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의 것”을 도둑질했다고 하셨고, 그것이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를 도둑질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리의 관건은 이 도둑질을 한 사람들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될 수 있는지, 즉 말라기 3장의 말씀을 오늘날에 그대로 갖다가 사용해도 되는지의 여부입니다. 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금부터 2천 4백년 전쯤 모세의 율법 아래 살았던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지 오늘날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고 십일조와 헌물 바치기를 거부했을 때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보내셔서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 아래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십일조와 관련해서 도둑질 운운해선 안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무고죄(?) 내지는 명예훼손죄(?)에 해당될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에 의거한 고대 이스라엘의 세금제도였습니다. 우리는 그때 세 종류의 십일조가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분배받지 못하고 특별히 따로 택함을 받은 레위 사람들을 위해 바치는 십일조,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절기 행사를 위해 바치는 십일조, 그리고 레위인들, 나그네들, 고아들, 과부들을 위해 3년에 한 번씩 바치는 십일조.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일년으로 치면 수입의 23.33퍼센트를 바쳐야 했습니다. 이것이 있어야 이스라엘 나라가 잘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절대 다수(“온 나라가”)가 그것을 바치지 않아서 나라 살림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도둑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미국이나 한국의 국민 대다수가 세금 내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세금이 거의 걷히지 않을 때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지금부터 2천 4백 년 전 이스라엘 나라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 정부나 한국 정부가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서슬 퍼런 IRS와 국세청에서 세금 납부를 거부한 사람들을 죄다 세금 도둑으로 간주하고, 수사해서 죄가 밝혀지면 체포하고야 말 것입니다. 특히 미국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이라면, IRS가 탈세한 사람들을 얼마나 무섭게 다루는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고대 이스라엘에서처럼 세금을 거부하는 것이 도둑질이 됩니다. 하지만 모나코 같은 나라에서는 세금 도둑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나코는 국방, 외교, 치안을 프랑스에 의존하고, 나머지는 관광 수입으로 충당하므로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걷지 않아도 나라 살림이 잘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적인 교회도 원래 고대 이스라엘의 세금제도에 해당하는 십일조를 교인들로부터 걷지 않아도 잘 돌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모나코처럼 의존하는 대상이 따로 있어서도 아닌데 어떻게 잘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십일조와 관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초대 교회는 고대 이스라엘과는 달리 세금제도 같은 십일조 징수 없이도 잘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우신 유기적 교회에는 옛날 이스라엘의 레위인이나 제사장처럼 가나안 땅의 기업을 받지 못하고 십일조를 받아서 생활하는 위치에 있는 특별한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제사장이었고 따로 택함 받은 거룩한 소수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사역의 기능이 서로 다를 뿐이었습니다. 또 교회가 무슨 성전이나 회당을 건축할 필요도 없었고, 절기 행사를 해야 할 필요도 없었으므로 그것을 위해 십일조를 하고 따로 헌금을 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교회가 돌아가야 하는데 어디서 돈이 생겼습니까? 이런 질문이 당연히 따라올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교회가 돌아가는 데는 돈이 별로 필요없었고, 돈이 필요하면 필요한 만큼 지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헌금을 하면 되었습니다. 이런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도들이나 다른 사역자들이 교회의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들이댄 적이 없습니다. 교회와 십일조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1세기의 교회들은 어디에 돈이 필요했을까요? 신약성경에 보면 교회 안에서 구제하는 일과 교회를 세우러 다니는 순회사역자들의 경비를 지원하기 위해 헌금한 예가 있을 뿐, 다른 예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들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갑니다. 건물 구입 또는 건축을 위한 돈(그것도 성전 건축이라는 비성서적인 표현으로), 건물 유지비, 온갖 가구와 장비에 들어가는 돈, 각종 행사와 프로그램에 드는 돈, 직책을 맡은 사람들의 봉급(명칭을 고상하게 바꿔 사례비라고 하지요) 등등. 그러나 이런 데에 들어가는 돈 대부분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에서는 거의 필요치 않은 돈입니다. 신약성경적인 유기적 교회에는 건물이나 직책이나 절기 행사나 고정된 프로그램이나 봉급 같은 것이 없습니다. 즉, 오늘날 교회 예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돈이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교인들로부터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돈을 징수할 필요도 없고, 또 징수하거나 은근히 압렵을 넣어 십일조하지 않는 것이 도둑질이라는 암시를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십일조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필요로 가득하므로, 교인들 상다수가 교회에 돈을 바쳐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신앙생활을 합니다(물론 십일조와 헌금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몇 배로 뻥튀기 해주신다는 믿음에 의해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대부분의 자유주의 국가에 사는 국민들이 보통 수입의 20에서 30퍼센트를 세금으로 내야 하는데(고대 이스라엘의 23.33퍼센트와 비슷),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위에 또 10퍼센트를 교회에 십일조로 바쳐야 하니 허리가 휘지 않겠습니까? 물론 부자들은 세금을 내고, 그 위에 십일조를 바쳐도 다 감당할 수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여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도 어떤 지도자들은 세금을 떼기 전의 Gross Income에서 십일조를 해야 도둑질이 아니라고 강조하니(자영업 하는 교인들에게 순수입이 아닌 매상에서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도 있음), 교회생활을 늘 중압감에 시달리면서 하는 교인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교인들이 신약성서적인 유기적 교회를 만난다면 십일조와 교회는 관계가 없음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라기 3장의 문맥과 신약성경에 남아 있는 십일조 정신


우리가 살펴 보고 있는 본문인 말라기 3:8-10의 문맥을 보면, 바로 앞인 3:5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신다는 이 말씀과 바로 뒤에 따라오는 내용인 ‘십일조 도둑질’과 뭔가 연관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3년에 한 번씩 바쳐야 하는 십일조 중에는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구제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책망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십일조 도둑질 죄가 바로 이 세 부류의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억울하게 한 죄였던 것입니다. 온 나라가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 가난한 사람들이 아사 직전에 놓이게 되었던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은 율법 이전에 하나님께서 간직하고 계신 마음입니다.

따라서 신약성서적인 교회에는 하나님의 이 마음, 즉 모세의 율법에 의거한 십일조의 다른 항목들은 불필요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십일조의 정신은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는 유대인들의 교회에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교인들을 책망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4-17).

구제를 위한 십일조의 정신이 신약성경적인 교회에도 계승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수입에서 정확히 십일조를 계산해서 바쳐도 같은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의 절실한 필요를 외면하면, 말라기에서 말씀하신 그 “도둑질”을 한 것이나 다름 없을 것입니다. 필자가 여러 해 전 신문에서 읽은 다음과 같은 기사의 내용이 아마 그런 도둑질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한국에 있는 한 대형 교회가 교인수가 늘어 예배당이 협소하다고,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몇 십억짜리 멀쩡한 교회당을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몇 백억짜리 새 교회당을 짓겠다고 헌금을 반 강요하고 있을 때, 그 교회의 구역장인가 하는 사람의 일가족이 지하 단칸방에서 생활고를 비관하며 연탄불을 피워놓고 자살했다는 내용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해당되지도 않는 십일조와 헌금을 문자적으로는 강조하면서, 정작 십일조의 정신과는 따로 노는 오늘날 제도권 교회의 단면을 보여 준 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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