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에는 전문 교회음악 사역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찬송을 부르는 것과 인도하는 것이 교회 지체들 모두의 몫이었음을 신약성경을 통해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이것이 4세기에 와서 성직자와 성가대의 등장과 함께 졸지에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콘스탄틴 황제가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반포한 이후 그리스 문화의 영향, 그리고 로마의 황실 의식에서 행해졌던 행진 음악의 영향이 교회 안으로 침투함으로써, 교회 안에 전문 음악인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즉 성가대원들에게 성직자 다음의 지위가 주어졌습니다.

성가대의 기원


그러므로 전문 교회음악 사역을 당연시하는 오늘날의 교인들에게 이런 역사를 바로 알게 해서 그들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성가대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면 오늘날의 교회 음악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집중적으로 연구한 사람들에게서 듣는 편이 좋을 것같아서 아래에 프랭크 바이올라와 조지 바나의 책 『이교에 물든 기독교』의 216-218페이지에 있는 ‘성가대의 기원’에서 발췌하여 인용합니다.

성가대의 뿌리는 그리스 이교 신전들과 그리스 연극에서 발견된다. 윌 듀란트는 멋지게 표현했다: “고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중세에도 연극의 주된 뿌리는 종교의식이었다. 미사 자체가 극적으로 연출된 구경거리였고, 성당은 신성한 무대였고, 미사의 참여자들은 상징적인 소품을 입었으며, 사제와 다른 성직자들은 극 중 대사를 읊었고, 사제와 성가대 그리고 성가대 안에서 번갈아 노래하는 것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의 신성한 제사의식 연극에 나오는 대사와 똑같이 발전하였음을 정확하게 암시해 주었다.”

기독교 교회 안에 성가대가 등장하면서, 찬양을 부르는 것이 더는 하나님의 사람들 모두의 것이 아니라 훈련된 성악가들로 구성된 스태프 성직자의 것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단 교리들이 찬송을 통해서 퍼져 나간 사실에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찬송을 좌지우지한다면 이단의 확장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기독교 드라마의 주연으로서 날로 커지는 성직자의 권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367년에 가서, 회중 찬송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그것이 훈련된 성가대의 음악으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교회 안에 훈련된 전문적인 성악가가 탄생했다. 기독교 예배에서의 노래는 이제 성직자와 성가대의 전유물이 되었다.

암브로즈는 사도 시대 이후의 기독교 찬송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었다. 이 찬송들은 고대 그리스 형식을 본떴고, 그 노래들에 그리스 제목을 붙였다. 암브로즈는 또한 오늘날 일부 가톨릭 교회들에서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의식용 성가의 합본도 만들었다. 의식용 성가는 로마 이교 제가의 직계 후손으로서, 고대 수마리아 도시들의 의식에서 모방한 것이다.

교회 성가대는 5세기에 시작되었다. 그레고리가 6세기 말에 교황이 되면서 로마에 있던 음악학교를 재정비했다.(이 학교는 335년에 죽은 실베스터 교황에 의해 창립되었다.)

그레고리는 이 학교를 통해 로마제국 전역에 걸쳐 기독교 성가대를 훈련하게 될 전문 성악가들을 길러냈다. 성악가들은 9년 동안 훈련받았다. 그 훈련은 그 유명한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를 포함한 모든 노래들을 다 외워야 하는 그런 훈련이었다. 그레고리는 음악이 성직자에게 국한된 기능이고 훈련된 성악가들만 독점할 수 있는 권리라고 믿음으로써 회중 찬송의 마지막 흔적마저 싹 지워 없애 버렸다.

훈련된 성가대들, 훈련된 성악가들, 그리고 회중 찬송의 멸절, 이 모든 것은 그리스 사람들의 문화적 사고방식을 반영했다. 웅변(전문적인 연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문화는 청중-공연자의 역학구조로 이루어졌다. 비극적인 것은 이런 경향이 다이애나 신전과 그리스 연극에서 기독교 교회로 직수입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씀사역뿐만 아니라 찬송을 부르는 데 있어서도 구경꾼이 되어 버렸다. 유감스럽게도, 그리스의 구경꾼 정신이 아직도 현대 교회에 살아 있다.

찬송에 있어서도 구경꾼으로 전락한 교회 지체들

모든 지체가 다 참여하여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신약성경적 교회 모임이 제사의식으로, 성스러운 예배로 바뀌게 되어 지체들은 전문가들이 앞에서 공연하는 것을 관람하는 구경꾼으로 전락했습니다. 따라서 유기적인 교회의 그림자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교회음악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천 년 이상 계속되어 오다가, 종교개혁자들이 회중 찬송을 부활시키면서 조금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지만 전문 음악 사역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 지체들은 여전히 전문 음악인들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전문 교회음악 사역이 이름과 형태만 바뀔 뿐 내용은 항상 그대로입니다.

결과적으로, 앞에서 암시했던 것처럼 음악적 재능이 마치 무슨 영적인 능력이나 되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교회가 양산해 내고 있습니다. 반면에 구경꾼으로 있는 것보다는 교인들 앞에서 돋보이는 성가대나 예배 인도팀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므로, 음악적 재능이 별로 없더라도 악착같이 성가대나 예배 인도팀에 있기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더 한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서도 음악을 좀 한다고 해서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꽤 있다는 사실입니다. 필자가 아는 사람 중에 예수를 전혀 믿지 않는데도 성악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주일 예배 때마다 성가 독창을 하는 솔로이스트도 있습니다. 은혜 받았다고 “아멘”을 연발하는 구경꾼들 앞에서 말입니다. 물론 돈을 받고 하고 있지요. 대형 교회의 주일 예배에 일당을 받고 오케스트라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대학생들의 아르바이트 얘기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적 교회 음악을 왜곡시킨 현대 교회의 비극의 한 면입니다. 모든 지체가 참여하는 신약성경의 유기적인 교회 모임을 구경꾼들 앞에서 공연하는 전문 사역자들의 몫으로 전락시킨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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