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짜리 교회(46)

 현대식 설교는 신약성경 어디를 봐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성경이 아닌 그리스의 수사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의 수사학이 어떻게 교회 안에 깊이 침투하게 되었을까요? 처음 수세기의 기독교 역사를 살펴 보면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종교 전문가들의 출현

이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복음의 초기에 교회를 세우고 돌보던 베드로나 바울이나 바나바나 디모데 같은 순회 사역자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면서 그들의 공백을 메우려는 성직자들이 지역교회들에 출현했는데, 이것이 유기적 교회를 방해하고 종교 전문가들에 의해 주도되는 교회를 만들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초대교회의 모임, 즉 모든 지체가 참여하여 서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열린 모임이 일찍이 전문 성직자가 주관하는 예배의식으로 탈바꿈해 버린 것입니다.

이제 교회 안에 이 세상처럼 계급이 생겨 상위 몇몇 지도자에 의해 인도되는 예배의식에 하위 대다수의 지체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참석하는 것이 정상적인 교회생활로 굳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의식도 다른 악세사리들이 붙어 있는 설교 중심의 공연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즘에 와서 예배 때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하지만, 목사의 설교를 돕는 수준, 그리고 수동적인 청중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교회가 전문 종교 지도자들의 독무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수사법의 등장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독교가 로마제국 전체로 퍼져나가면서 수많은 이교의 연설가와 철학자가 기독교인이 되어 대거 교회 안으로 유입되었고, 그들 상당수가 이런 전문 종교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돈을 받고 연설을 하는 전문 연설가의 개념이 자연스럽게 기독교 안에 정착되어, 지역교회들 안에 상주하는 전문 설교자들이 그리스의 수사학을 바탕으로 한 신종 스타일의 메시지를 탄생시켰습니다. 즉,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는 설교자들의 연설 기교가 돋보이는 설교가 등장한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 봤던 그리스식의 수사법에 훈련되어야만 할 수 있는 세련되고 화려한 웅변식의 설교입니다. 이에 아래와 같은 초대교회의 모임은 자취를 감추게 되고 유기적인 교회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골 3:16).

이렇게 교회 안에(“너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가득 차서 모든 지체가 그 말씀으로 서로(“피차”) 가르치고 권하던 그런 초대교회의 모임이 이제는 예배의식을 주도하는 몇몇 전문 성직자, 특히 강단을 독점하는 전문 설교자들의 사역장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내용을 그리스식 수사법에 의해 전달하는 기독교식 설교가 탄생하여 오늘까지 이어져내려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이제 지체들의 손을 떠나 신학교에서 훈련받은 전문 성직자의 전유물이 되어, 잘 꾸며진 연설 방식의 작품으로, 강단에서 수동적인 청중들에게 쏟아붓는 일방적 설교로 탈바꿈했습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설교 공연예술이라고나 할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필자 자신이 보고 배워서 20년 가까이 행했던 지난 날의 설교를 뒤돌아보며 스스로 평가한 다음 내린 결론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이미 구약시대 때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에 의해 항상 있어왔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끊임없이 하셨고,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꾸준히 행해졌던 일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말씀 전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절대적인 필수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위의 골로새서 3:16에서 강조한 것처럼 교회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주셨다고 성경은 곳곳에서 증언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래와 같은 구절들이 이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롬 12:6,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고전 12:7,8)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 5:17).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이렇게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현대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강단 설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현대 교회의 강단 설교는 똑같은 사람에 의해 매주(그리고 매달, 매년, 평생토록) 규칙적으로 수동적인 똑같은 청중을 향해 다듬어진 연설 형식, 그리고 일방적인 선포 형식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설교자가 교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성경의 내용을 빌려서 하는 설교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교회를 세우는 순회 사역자가 특정 지역에서 교회의 기초를 놓아 주는 당분간은(몇 달 혹은 몇년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 다음 그 사역자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주도 하에 지체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도록 맡겨놓고는 또 다른 지역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떠납니다. 떠난 후에 이전에 세운 교회들을 간헐적으로 돕긴 하지만 그 사역자가 한 곳에 상주해서 끊임 없이 같은 청중들을 향해 설교한 예는 신약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설사 한 곳에 거주하더라도 그곳의 교회를 평생 동안 맡아서 정기적으로 설교한 예는 신약성경에 더더욱 없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 오랫동안 머물렀지만,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같은 청중에게 강단에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이나 1세기의 사역자들 그 누구도 그리스식 수사법에 의해 꾸며진 세련된 설교, 곧 오늘날의 강단에서 청중을 매료시키기 위해(소위 은혜받게 하기 위해 애쓰는) 행해지는 설교를 한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다른 사역자들의 메시지 어디에도 그런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를 파악해 메시지로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성경 내용을 설교한다고 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강해설교를 한다고 해서 자부심을 갖는 설교자들이 많은데(이전에 필자도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꼭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와싱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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