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미 지역에 긴 여름 가뭄이 끝나고 이 지역 특유의 시도 때도 없이 울먹거리는 날씨가 찾아왔다. 너무 긴 시간 메말랐던 대지에 많은 나무들이 말라죽고, 예쁜 단풍잎 한 번 피워 보지 못한 수많은 활엽수들이 메마른 잎사귀를 힘없이 흩날린다.

사철 수목이 울창한 이곳은 계절 따라 각종 풍성한 토산품이 넘쳐나는 살기 좋은 곳이다. 봄이면 높고 낮은 산야에 각종 야생 나물들이 돋아나는데, 그중에 고사리가 단연 최고의 인기를 자랑한다. 굵고 부드러운 맛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어서 워싱턴 주 체리는 굵고 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늦봄에 찾아오는 준치는 많은 태공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여름에는 각종 조개류, 던지니스 꽃게, 다양한 생선이 풍성하고, 어디를 가든지 야생 딸기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많이 생산되는 포도는 점차 재배 면적을 넓혀가고 있으며, 가을이면 사과 익는 맛있는 냄새가 미국에서 가장 많이 풍기는 곳이기도 하다. 10월 중순부터 돋아나는 새하얀 송이버섯의 부드러운 맛과 향취는 미식가들을 흥분하게 한다.

지난 수요일 저녁, 아내가 가까운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2시간여 고속도로를 타고 달려야 하는 본 교회 저녁예배에 참석하고 돌아오자면 밤 12시가 다 되기 때문에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어서, 종종 집 가까이 있는 같은 교단의 교회를 다니기도 한다. 지난 수요일에 아내가 가까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그 동안 친해진 장로님께서 주셨다고 삶은 밤 한 움큼을 가지고 왔다. 그 장로님이 우리를 밤 산에 데리고 가기로 약속했다고 좋아했다.

온대지방에 있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밤나무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약 2천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재배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탄수화물, 단백질 등 많은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고, 위장기능을 촉진시키고, 피부미용이나 당뇨 등에 유익한 작용을 하며, 제사상에 올라가 귀한 대접을 받는 과일이다.

아내는 가게를 보아야 했기 때문에 나 혼자 따라 나섰다. 안내하시는 부부와 내가 도착하니 이미 여러 사람들이 와서 줍고 있다. 토종밤이라서 크지는 않지만 얼마나 맛이 좋은지 모른다. 가파른 언덕을 조심조심 올라가니 온통 밤나무로 뒤덮인 곳곳에 붉은 알밤이 뒹군다. 한창 떨어지는 철은 지났고 이미 끝물이다. 여기저기에 입을 딱 벌린 빈 밤송이와 마른 잎이 수북이 쌓여 있고, 발자국이 어지럽다. 그래도 정신없이 밤을 줍는다.

줍는 사이사이로 후드득후드득 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여러 사람들이 밤을 줍기 위하여 열심히 땅만 보고 돌아다닌다. 이렇게 해서는 밤을 많이 줍기 어렵겠다싶어 우리 집 뒤뜰에서 밤을 줍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위를 쳐다보며 밤이 많이 떨어져 있을 만 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드디어 밤 나뭇가지가 많이 발달하고 나무 밑에는 움푹 꺼진 작은 골짜기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무성하게 엉켜 있는 야생 산딸기 숲을 찾아냈다. 밤송이와 마른 잎이 수북이 쌓여 있는 사이사이로 붉은 밤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다.

미리 준비해 간 고무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가시덩굴을 제거하고 좁은 공간을 확보한 후에 납작 쭈그리고 앉아 작은 나무꼬챙이를 만들어 밤송이와 낙엽을 살살 헤집으니 예상했던 대로 토실토실 밤 토실, 붉은 알밤들이 수북이 쌓여 겨울잠 차비를 하고 있다. 다 익은 알밤이 먼저 떨어지고 나서 밤송이가 떨어지고, 그 위에 낙엽을 덮어 주면 얼지 않고 겨울나기에 훌륭한 보금자리가 만들어지고, 다음해 봄에 새싹을 틔워 종족번식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다람쥐나 오소리, 멧돼지 등등 온갖 야생동물들이 도토리나 이런 밤을 찾아내어 겨울을 나기도 한다.

이곳이 바로 다람쥐의 곳간이다. 구석구석 풍성하게 숨겨져 있는 것을 겨우내 헤집고 찾아내어 싱싱한 밤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자연 곳간이다. 알맞은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는 최고의 보관창고 인 셈이다. 다람쥐들이 너무 많은 먹을거리에 배가 불러서 한 입 뜯어 먹고 버린 밤알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어렸을 적 어른들이 늦가을에 다람쥐굴을 발견하면 밤을 한 말 이상 얻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셨는데 오늘 처음 확인하는 즐거움을 맛보았다.경사가 급한 그린벨트 지역이어서 누구 하나 관리하는 사람도 없다. 길고 무더웠던 여름 가뭄에 물 한 번 주는 사람 없어도 하나님이 키우셔서, 동물이나 사람이나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동물들을 유난히 사랑하는 늦둥이 같은 맏딸 시내가 “사람들은 냉장고에 먹을 것이 가득한데 다람쥐가 겨울에 먹을 도토리를 다 주워다가 묵을 해먹으면 어떻게 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 밤을 줍는 것을 먼발치에서 밤을 까먹으며 바라보던 다람쥐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쁨과 보람이 컸던 만큼 팔등이며 손가락과 손등 이곳저곳은 산딸기의 날카로운 발톱에 찢기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밤 가시가 박혀서 따갑고 아프다. 그러나 수고와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이 어디 있으랴. 소중한 선물을 혼자 먹기 아쉬워 그 동안 마음에 빚진 분들과 나누면서 풍요로운 가을을 만끽할 수 있도록 베푸신 풍성한 은혜가 감사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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