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화 목사( 레이크랜드 장로교회, FL)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쓰라린 상처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처가 집착을 낳고, 그 집착은 우리의 상처를 가슴 속 깊이 새겨 놓습니다. 그리고는 그 상처를 보고 원망하고 분노를 품습니다. 이러한 원망과 분노는 때때로 실제 사건보다는 잘못된 상상력에 의해서 강화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상처를 잘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까지도 극단적으로 불행한 상상을 하면서 고통 받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상처가 가인과 같은 패턴으로 진행되기가 쉽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상처로 인하여 활화산처럼 솟아오르는 분노와 원망의 감정이 가인과 같은 패턴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미국 심리학계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는 윌리엄 제임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화가 나면 그 감정을 계속 되새김으로써 분노가 폭발할 때까지 분노심을 스스로 키운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격한 감정을 자제하라. 그러면 그 감정은 수그러들 것이다.”

<Of Course You are angry> 라는 책을 보니까 원망과 분노의 감정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말하고 생각하는 ‘혼잣말’에 의해 부추겨지고 지속되고 불타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부정적인 혼잣말을 긍정적인 혼잣말로 바꾸어야 한다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의 밑바닥에는 불확실하고도 부정적이며 비합리적인 생각이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느낌은 부정적인 생각에서 야기되기 때문에, 느끼는 방법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연민 또한 부정적인 혼잣말에 의해서 생겨나는 분노의 감정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이 느낌을 지배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결코 변화될 수 없을 것이고 삶은 계속 갈등과 긴장, 원한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가만히 제 자신을 비추어 생각해 보니 상당히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혼잣말은 우리의 본능적인 생각을 꿈틀거리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속에 있는 혼잣말이지만 “에이, 이판사판이다” 그런 말을 하면, 실제로 이판사판 일을 저지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내가 절대 가만 안 둔다”이런 말을 하면 우리의 생각은 그 사람을 살인하는 데까지 진행됩니다. “난 너무 아파서 견딜 수 없다” 그러면 정말로 아파서 견딜 수 없어집니다. 그런데 “그래 괜찮아, 그래 그럴 수 있어, 당신을 이해해, 당신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어”이런 말을 하면 마음의 상처가 달래집니다. 때로는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게 무슨 큰 문제인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지”이렇게 말을 하면 상처들이 대수롭지 않게 보입니다. 실제로 제 자신에게 시도해 보니 “혼잣말”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가 폭발하기 전에 혼잣말을 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쪽으로, 가능하면 상대방을 용서하는 쪽으로,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가능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말입니다.

문제는 상처에 대한 집착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도 그것에 집착하면 문제가 커지고 상처가 커져서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집착이 강한 사람일수록 상처를 쉽게 받고, 자기 연민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곽노순 목사님의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산길을 가다가 발을 헛짚어 벼랑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행히도 흙 밖으로 나온 나무뿌리 하나를 잡게 되었습니다. 천행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얼마간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그는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 흑암에 둘려 발 밑의 천 길을 생각하니 전신이 떨려왔습니다. 그래서 잡은 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두 손에 힘을 모은 채, 후들후들 떨리는 가운데 젖 먹던 힘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살려만 주시면 하나님을 위해 뭐든지 하겠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두 손을 놓으라” 그 때 이 사람은 “아니! 내가 살려 달랬지! 언제 천국 간다고 했습니까? 이 상황에서 두 손을 놓으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지옥보다도 긴 악몽의 시간에 떨어졌습니다. 야박하게도 하나님은 더 이상 아무 응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날이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벼랑 아래를 바라보았더니 천길 벼랑이 아니라 자기 키만큼도 되지 않는 곳에 넓은 땅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 이 사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집착이 이런 것입니다. 붙들고 있을수록 고통스러운 것이 집착이고, 놓으면 자유롭고 행복한 것이 집착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났다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 구조가 점점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어있고, 결국은 상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절대자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의 집착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인의 상처를 묵상할 때 가인과 대비되어 떠오르는 인물이 사사기서에 나오는 “입다”였습니다. 그는 큰 용사였지만 기생의 아들이었습니다. 기생의 아들이라는 것이 그의 큰 상처였을 것입니다. 떳떳하지 못한 신분,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가장 소중한 존재이지만 그 소중한 어머니를 떳떳하게 자랑할 수 없는 상처, 이 신분문제 때문에 결국은 집에서 쫓겨나야 했던 처량한 신세. 어머니가 부끄러우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끄러운 법인데 상속문제 때문에 형제들에게서 쫓겨나야 했던 입다. 그는 세상을 원망하여 상처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도 있었고, 용사의 기질을 발휘해서 충분히 앙갚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용사로서 자신의 기질을 발휘하여 힘쓰는 자들의 리더가 되어 전시에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해 위기에 봉착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되었고, 결국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둘 다 동일한 거부감과 상실감이라고 하는 상처를 받았을 테지만 가인은 상처를 해결하지 못하고 살인자가 된 반면에, 입다는 상처를 딛고 전쟁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상처를 해결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상처에 매몰되어서 쓰라린 가슴을 달래며 아무런 대책 없이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거나, 상처로 인하여 더 큰 꿈을 품고 살아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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