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화 목사 (레이크랜드 장로교회, FL)

언젠가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청하고 있는 엘리야에 대해서 묵상을 하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그 흐르는 눈물이 제 가슴을 적시고 제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의 한 분 아닙니까?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했더니 이스라엘 전역에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으며,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도 했고, 담대하게 아합 왕을 찾아가서 우상숭배하는 그의 죄를 지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의 대결을 요구하여, 마침내 갈멜산에서 멋지게 승리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담대하고 위대했던 선지자 엘리야가 하루는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힌 채 하나님 앞에서 죽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말입니다. (왕상 19:4)
처음에는 이 사건을 묵상하면서 엘리야의 행동이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 그토록 당당했던 능력의 종 엘리야가 어떻게 해서 자신을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위협 한 마디에 그렇게도 겁에 질려 이스라엘 군대가 쫓아올 수 없는 유대 땅 브엘세바까지 도망가서 죽으려고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연약한 엘리야의 모습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엘리야로 하여금 이토록 인간적인 비애와 좌절을 느끼게 만들었는지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그 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였나이다”(왕상19:10).

하나님께 자신의 열심이 특심이었다고 말했듯이, 엘리야는 하나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오히려 더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을 돌아보니 하나님 섬기는 사람이 이제는 자기 혼자밖에 없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절망스러웠던 것입니다.
아마도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기도의 응답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제거함으로써 이제는 무엇인가 세상이 변화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정도 했으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했던 아합 왕과 이세벨이 우상숭배하는 일을 그만 둘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세벨의 기세가 꺾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기 등등하여 주의 제단을 파괴하고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모두 잡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엘리야까지 잡아 죽이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느꼈던 무기력감과 좌절감은 엄청났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엘리야에게 이런 생각이 저절로 났을 것입니다. ‘참 안 되는구나! 이렇게까지 해도 안 되는구나! 이제는 나밖에 안 남았는데 이스라엘에 무슨 희망이 있다는 말인가’ 바로 이러한 무력감과 좌절감이 그토록 당당했던 엘리야로 하여금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엘리야를 죽고 싶도록 절망하게 만든 것은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실현될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데서 오는 의인의 절망감 이었습니다.
때때로 제 자신도 엘리야와 동일한 좌절감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헌신했으면 세상이 조금은 긍정적으로 변해야 하는데, 상황이 더 악화된 것처럼 보일 때, 자신도 모르게 영적인 무력감에 빠지게 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은혜 가운데 살면 무엇인가 좋아져야 하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 밀려오는 허탈감과 절망감이 때때로 제 자신을 얼마나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렇게 점점 희망을 상실하게 되면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겪었던 절망감은 바로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내 생명을 취하소서”(왕상 19:4).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청하면서 한 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를 위해서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 실패만하고 내 할 일이 다 끝난 것 같습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가주시되, 죽는 거라도 편안히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마도 이런 마음으로 엘리야는 하나님께 말했을 것입니다. 
이때 엘리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우울한 마음으로 차라리 편하게 잠이나 자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엘리야. 그 마음이 이해되십니까? 그 긴 한숨 소리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좌절감과 무력감이 컸으면 자다가 죽으려고 잠을 청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한 번 제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쳐 왔는데, 이제는 되나 싶었는데, 아직도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고 막막할 때 그 절망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저는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엘리야의 슬픈 마음이 느껴져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마치 무엇인가 절망에 사로잡힌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절망 가운데 있는 엘리야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무기력감에 빠져 죽기 위해 잠든 엘리야를 위해 천사를 보내서 그를 어루만져 줍니다.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냐, 나도 그 마음을 안다’ 하는 마음으로 지쳐 잠들어 있는 엘리야를 어루만져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갓 구워낸 과자와 물을 준비해서 다시 힘을 내라고 엘리야를 줍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먹도 또 잠을 잡니다. 죽어야 되니까 또 잠을 자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잠을 자고 또 잡니다. 살아 있는 것이 힘들고 너무 외로워서입니다. 아마 엘리야는 이런 심정으로 잤을 것입니다.
저도 잠시 동안 우울 증세를 겪은 적이 있어서 잘 압니다. 처음에는 너무 억울하고 속상해서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까 차라리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곤 했습니다. 그 때도 교회에 다녔으니까 차라리 기도하다가 주님의 품에 안겼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지옥에는 안 갈 테니까요.
사람들은 현재 겪는 갈등이 버겁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기대할 수 없으면 한 번쯤은 자살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다 마는 것이고 정서적으로 약한 사람들은 이런 생각 끝에 극단적인 시도를 하다가 불행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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