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화 목사 (레이크랜드 장로교회, FL)

소망을 품으면 죽음에서도 생명을 보지만 절망에 묻히면 생명에서도 죽음을 본다.”라는 글귀를 [생명의 삶]에서 본 적이 있는데, 공감이 갔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일지라도 한 번 절망의 늪에 빠져 버리면 쉽게 헤어나오기 힘든 까닭은 절망에 묻힌 사람은 생명에서도 죽음을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처가 위기로 이어지는 까닭은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낙심하면 판단력이 흐려져서, 결국 살아야 할 이유를 못 찾고 자꾸 죽음의 세계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였지만 한때 삶의 희망을 놓아버린 마음, 낙심하는 마음이 엘리야로 하여금 죽음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는 다시 엘리야를 깨웁니다.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아직 희망이 남았다고,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기운을 차리고 힘을 내라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라고. 우리가 아무리 상처 가운데서 헤매고 있다고 할지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좌절감과 무기력감에 빠져 있던 엘리야를 깨우시고 위로한 장면을 그려 보면, 마치 어머니가 실의에 빠진 아들을 품에 앉고 위로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더 이상 주를 위해 할 일도 없고 소망도 없다고 죽기를 바라는 엘리야를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위로하고 깨우셨듯이, 하나님은 때때로 지치고 상처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힘드냐? 나도 안다. 네가 얼마가 힘든지. 하지만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야. 난 너를 통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단다. 자 기운을 차리거라.’
상처 때문에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해 버리고 싶을 때, 세상에 나 혼자뿐인 것 같아서 너무나 외로울 때,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해서 삶이 버거울 때, 그래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그 땐 정말로 희망이 없습니다. 좌절감에 지쳐 있는 엘리야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묵상 하는 데 불현듯 이런 찬양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아시네 우리의 약함을/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이 찬양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위로해 주시는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은 제 자신의 체험이기도 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적인 치료가 우리를 공감해 주고 이해해 주는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의 위로는 삶의 에너지와 희망까지 회복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근본적으로 치유함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극도의 무력감 중에 참으로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는 참으로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합니다”(왕상19:6). 

지금까지 엘리야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해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세상에 아무런 변화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엄청난 기적도, 그 이전의 숱한 능력들도 자기가 남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본래 모습은 한 여인의 위협도 감당하지 못해서 이렇게 멀리 도망나올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실제로 엘리야의 능력은 엘리야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능력의 선지자로 세워서 그 일을 감당할 만한 능력을 주었기 때문에 엘리야가 그 능력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에게 어떤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이 엘리야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엘리야를 쓰시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엘리야가 위대한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쓰라린 패배감을 안고 죽음 같은 좌절의 시간을 보내기 전까지는 그것을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직 기다려야 했습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도구로 쓰임 받는 존재임을 고백할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연약함을 이렇게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찾아와 그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천사가 주신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서 맨 먼저 갔던 곳이 바로 호랩산입니다.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사명을 회복했던 산입니다. 엘리야가 기운을 차리고 맨먼저 하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호랩산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털어놔야 했습니다. 자기가 왜 그렇게 절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하나님께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자신의 의식이 회복되자마자 호랩산을 향해 출발했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호랩산에서 미세한 음성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을 때 맨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품었던 서운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상 19장 10절 말씀에서 엘리야는 “내가 하나님을 향한 특심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나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이럴 거면 왜 나를 선지자로 세워서 이렇게 비참한 꼴을 보게 하냐고 말없이 하나님께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처럼 절망에 가득한 심경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했을 때 비로소 온전한 회복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사명을 받게 됩니다. 

엘리야가 믿음이 없어서 절망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 가지 큰 오해를 합니다.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면 안 된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힘겨워도 믿음만 있으면 상처받지도 않고 모든 일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합니다. 절망 가운데 있으면서도 아프지 않은 척합니다. 그렇게 강한 척하다 보면 나중에는 정말로 아프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을 바라보면 너무 절망스럽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 자신이 믿음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상황이 힘들어서 속상하고, 그 다음에는 이런 것 하나 해결할 수 없는 자신 때문에 속상하고, 더 나아가서는 믿음이 없는 것 같아서 속상합니다. 그러니 더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때때로 절망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참으로 영적인 사람들은 절망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하나님에게서 그 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절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