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영(위스컨신)

유년주일학교 시절에 많이 불렀던 찬송 중에 ‘나의 사랑하는 책’이 있습니다. 템포가 빨라서 즐겁고 재미있게 불렀습니다. 후렴에 가서 ‘귀하고 장장장(귀하다) 귀하다 장장장(성경책)’할 때는 정말 흥겨웠습니다. 피아노 반주는 더 재미있었습니다. 옛날 용맹스럽던 다니엘의 경험과 주의 선지자 엘리야가 병거 타고 올라갔다는 대목은 부를 때마다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자라나면서 그 찬송을 다시 부를 때는 엄마의 무릎 위에 앉아서 성경을 들은 기억이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성경책을 찾아내어 껴안으며 나는 내가 그 책을 차지했다는 것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아주 옛날 글로 써있는 ‘성경뎐셔’였으며 맨앞 페이지에는 미국인 곽안련 선교사가 엄마의 성경학교 졸업을 축하하는 글이 한글로 적혀있습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어색하게 한국말을 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이렇게 한글을 쓰기도 했다는 것은 언제나 나를 감격시키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게 했습니다. 나는 자주 그 성경책을 열어봅니다.

엄마를 잘 몰라 뵌 것이 부끄럽고, 특히 돌아가실 무렵의 내 행동이 너무나 괘씸하게 여겨져서 죄스럽기 한이 없습니다. 암으로 돌아가신 엄마는 기운이 진할 대로 진하셔서 힘드셨어도 신음 한번 내지 않으셨고 가끔 “예수님은 얼마나 아프셨을까”라는 말씀만 하시고 큰 숨을 몰아쉬곤 하셨습니다. 정신은 또렷하셔서 장례식때 써야할 음식까지 세세히 준비시키셨습니다. 나는 속으로 병이 낫기를 기도드리고 있는데 이리저리 지시하시는 것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편찮으신 엄마는 내가 피아노로 치는 찬송가 듣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엄마가 좋아하신 찬송은 젊었을 때부터 많이 부르셨던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와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였습니다. 어느 날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찬송가를 치다가 어쩐 일인지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를 쳤습니다. 엄마는 그날 “그만 쳐!”하시고는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피아노로 찬송가 쳐드리는 일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엄마의 마지막 생의 미련마저 몰아부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주요한 작시 구두회 작곡의 ‘어머님의 넓은 사랑’(304장)을 부를 때 나는 언제나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낍니다. 엄마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감사의 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내 나이 꼭 돌아가신 엄마 나이가 되었는데도 내가 살아있는 것이 죄송한 생각이 듭니다.
어릴 때부터 새벽기도회와 저녁예배에 엄마와 붙어 다녔으면서도 무릎 위에 앉히고 성경이야기 못 들은 것을 불평하고, 심하게 편찮으신 분에게 장송곡을 쳐드린 괘씸한 딸이 이 나이에도 엄마가 보고 싶어 가슴저려하며 엄마 이야기를 쓰는 것이 얼마나 뻔뻔한 일인지... 내 가슴에 못처럼 박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가끔씩 나는 엄마에게 기도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실 거라는 상상을 하면서 힘을 냅니다. 남편은 “이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것이지(히 7:25) 쯧쯧!” 
아무려나 엄마가 보고 싶다는 뜻이지요. 내가 울 때 기도하시고 기뻐할 때 찬송 부르셨던 엄마가 나를 용서하셨기를 바라며 삽니다. 우리가 잠든 이불 위에서 손님의 두루마기를 위해 밤새 마름질 하셨던 우리 엄마를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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