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에 전라남도 여천에 있는 “애양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께서 나병환자들과 함께 목회를 하셨던 곳입니다. 그곳에 있는 나병환자들은 모두 나이가 많았으며 시각장애인이었으며,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나병환자들은 가족들과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되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성한 사람이 가까이 오면, 자기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입술을 가린 채로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했습니다(레 13: 45-46).

이와 같이 나병 환자들은 가족과 이웃들로부터 고립을 당하고 버림받아야 했습니다. 공동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던 게지요. 사람은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법인데, 사회로부터 고립된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이지요. 이런 이유 때문에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이 죄의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고 나서 너무나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애양원에서 보았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외우고 찬양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사랑의 동산에 보내 주셨다고, 나병은 자신들을 사랑의 동산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장 비참한 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 때문에 가장 행복한 고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예수가 우리의 소망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도 예수가 나의 유일한 소망인가? 지금은 가장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 아니라 예수님도 나의 한 소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장을 보면 한 나병환자가 등장합니다. 사람은 본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좀 더 잘 살아보고자 하는 열망이 있을 때에 비로소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고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 두 번은 새로운 도전을 시도해봅니다. 그러다가 계속 실패하면 자포자기하고 모든 것이 운명이려니 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한 번 인생을 체념한 사람은 새로운 변화를 꿈꾸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격리된 나병환자들이야말로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마가복음에 등장한 나병환자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환경에 도전을 시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과감하게 자신의 치유를 위해서 예수님께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원래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가능하면 사람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곳에 고립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이들의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나병환자는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규범을 깨뜨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숙명에 따라 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 나병환자는 사회적인 규범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지탄받을 일을 한 것이지만, 그는 이러한 사회적인 규약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새로운 도전을 했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뛰쳐나왔고, 결국은 치유를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은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하는 숙명론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숙명론에 필사적으로 저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허황된 꿈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고, 작은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작은 것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인생은 도전하는 사람들의 것임이 분명합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사람들만이 흥분된 미래를 꿈꿀 수 있고, 자신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운명의 강 건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도전해서 그 강을 건널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나 봅니다.  이 나병환자가 이렇게 용기를 내어 도전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나오자마자 “꿇어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꿇어 엎드려 경배했다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이 나병환자가 이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기도를 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의 크기만큼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마음의 수양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도덕적인 지식을 얻기 위함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포기하지 않는 인생을 살기 위함입니다. 

이 나병환자가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용기”와 “믿음”의 확신입니다. 신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용감한 자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용기는 믿음이 있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자신에게 걸 때 역사하시는 분이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목숨을 걸면 무엇인가 이루어지는데, 이럴까 말까 망설일 때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 나병환자를 고쳐 주셨던 것도, 예수께서 찾아가서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이 나병환자가 자신의 생을 걸고 예수님께 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나병환자가 예수께 나왔을 때 예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가를 살펴보았더니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나병환자를 긍휼이 여기는 마음,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를 깨끗하게 하신 동기이며 이유입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예수께서 그를 보시면서, 그가 그 동안에 겪어왔을 아픔과 서러움과 외로움을 공감해 주고 이해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머리 속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반응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신 것입니다.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레 5:3에 의하면, 나병환자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아야 합니다. 나병환자와 접촉하는 것은 율법적으로, 물리적으로 불결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나병환자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이는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은 사회적인 관습의 힘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적인 관습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이 불결해지심으로써 나병환자를 치유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상처를 만져주셨을 때 이 나병환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모두가 자기를 불결하다고 피하는데, 예수님이 그를 만져 주었을 때의 그 감동은 어땠을까요? 자기 생애에 처음으로 사람대접 받던 그 순간, 그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람을 만나는데 뭐 그리 재는 것이 많은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우리 교회만큼은 이러한 차별이 극복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처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가 우리 인생의 문제해결의 열쇠이며, 치유의 열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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