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동녘은 보라빛 커튼 같은 하늘 밑으로 멀리 펼쳐진 산맥을 따라 땅과 하늘의 경계를  붉은 펜으로 그린 듯하며 해가 솟아오른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희망찬 아침 하늘의 환영을 받으면서 토요일새벽에 서는 벼룩시장에 가는 길이었다.

북쪽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도시, 이곳 스톡턴(Stockton)을 가운데 두고 남쪽과 북쪽을 잇는 중요한 고속도로가 있는데, 동쪽으로는 99번이, 서쪽으로 I-5가 달리고 있다. 도시의 중앙을 가로질러 이 두 개의 고속도로를 이어 주는 크로스타운 하이웨이가 만들어내는 고가도로를 지붕삼아서 토요일 새벽마다 서는 시장이 있다. 난전이긴 하지만 위로 펼쳐진  넓은 길이 지붕이 되어 주기 때문에 뙤약볕 강한 여름은 물론이요, 우기인 겨울에도 끄떡없이 열린다.
일찍 온다고 했는데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이 많기만 했다. 끝없이 펼쳐진 주차장엔 벌써 차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좀 멀리 떨어진 길가에 주차시키고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이른 봄인데도 채소들이 풍성했다. 검푸른 빛을 자랑하고 있는 잎이 두꺼운 시금치, 누구네 텃밭에서 자랐을까 벌써 나와 좌판 가득한 톳나물. 낯선 말소리가 가득한 동남아 사람들이 웅게웅게 모여 있는 좌판 위에는 그들이 즐겨 쓰는 열대 지방의 음식에 맞는 여러 가지 향신료라든가 그들만의 채소가 펼쳐져 있으리라.
걸음을 재촉하여 고구마 좌판을 향했다.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나 인기가 있는 그곳 역시 겹겹으로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뒤에 서서 기다리다가 일을 마친 앞사람이 빠져나가 내 차례가 되어가까이 다가가서 고구마를 고르고 있었다. 내 옆 사람과의 사이로 갑자기 길다란 팔 하나가 훠이훠이 공간을 만들더니 젊고 날씬한 여자 하나가 쑥 들어와 고구마를 고르는 거였다. 내색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무례함을 원망하는 사이, 내 몸이 옆으로 밀리며 주춤거리다가 그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다. 눈이 마주쳤다. 젊은 여자가 나를 향해 쌩긋 웃었다. 긴 팔로 시원시원하게 좋은 고구마를 골라서 내 봉지에 넣어 주었다. 어줍고 멈칫거리는 늙은이를 도우려 뚫고 들어왔던 것이다. 잠시의 원망이 고마움과 기쁨으로 바뀌었다. 계산을 마친 주인은 두어 개의 고구마를 집어 내 봉투 속에 넣었다. 어라! 덤까지!
사람 사는 곳이었다.

채소전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리는 내 귀에 ‘꼬~끼~오’ 생경한 소리가 들렸다. 붐비는 인파 속에서 어울리지 않는 닭의 울음소리가 내 발길을 잡았다. 시장 한쪽의 트럭에 실려 팔리길 기다리는 닭들의 무리에서 수탉 한 마리가 그 끼를 숨기지 못하고 목청을 돋구어 뽑아내는 소리였다. 고구마 보따리의 무거움도 잊고 닭들이 실린 트럭 옆으로 갔다. 닭장 안에서 알록달록한 한 무리의 닭들이 두려움 때문인지 둥그런 눈을 뜨고 부산스럽게 몸과 고개를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만에 보았던가! 분홍빛 벼슬과 노란 부리를. 잠시 시골 마당에 있는 듯한 착각을 했다.

오랜만에 살아 있는 닭들과 눈인사를 끝내고 목적지인 생선전으로 향했다. 채소전보다 서너 배 더 넓은 좌판엔 갖가지 생선들이 올라와 있었다. 검은 등을 한 홍어는 마름모꼴의 넓은 몸을 좍 펴고 물만 있으면 곧 하늘을 나는 비행기처럼 도도하게 헤엄칠 듯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머리와 뼈만 한 바구니 가득한 연어, 조기 비슷하나 몸집이 작고 입부분이 뾰쪽한 이름 모를 은색의 생선, 병어, 갑오징어, 오징어, 고등어, 생멸치처럼 자잘한 생선, 길이가 사람의 키만 한 은갈치 무리들이 저마다 파운드에 얼마라는 가격표가 꽂힌 바구니 밑에 잠자코 있었다.

한 가족이 모두 나선 듯했다. 아버지처럼 보이나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운 작은 키의 남자를 중심으로 아직 앳된 얼굴을 한 고등학생쯤 될까. 남녀 두 아이가  추워서 벌겋게 된 손을 입으로 연신 호호 불어가며 계산을 하고 있었다. 두꺼운 잠바 후드 속에 머리를 감추고 트럭 턱받이에 앉아 있는 아이의 주위에서 엄마가 서성거리며 손님을 맞고 있었다. 가족들이 단단히 뭉쳐 있는 모습은 어느 곳에서 마주할지라도 흐뭇하기만 하다. 열심히 살아서 추위에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나와서 한 마음으로 일했던 지난날을 기쁨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가족이 되길 바라며, 갈치와 병어와 오징어를 샀다. 거스름돈을 전해 주는 어린 아가씨의 손을 한 번 꼭 잡아 주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월남 사람들이 주가 되어 생긴 시장에는 전쟁을 피해 조국을 떠나며 단단한 각오를 한 사람들이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곳이 곧 사람 사는 곳이다. 실수하고, 원망하고, 무례도 있고, 도움도 주고받고, 말들이 오가고, 마음들이 오가고, 돈과 물건들이 오가는 사람 냄새 가득한 곳, 부대끼며 산다는 의미를 바로 이곳에서 체득하게 된다.

핸드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한  손엔 고구마, 한 손엔 생선 보따리를 힘겹게 들고 인파 속을 헤치며 나오는데 무겁고 불편하다기보다 마음 한 구석에서 뿌듯한 기쁨이 흘러나옴은 웬일일까.
길가에 주차해 놓은 자동차에 이르렀을 때, 어느덧 보랏빛 커튼을 젖히고 하늘 위로 올라온 해님이 승전한 병사를 맞는 임금같이 나를 비추며 웃고 있었다.(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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