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를 회복한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무엇을 가장 회복하고 싶은가? 스스로 자문자답해 봅니다. 따뜻한 가정을 회복하고 싶고, 순수한 영성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주변에 있는 몇몇 목회자들이 말합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회복하고 싶은 것은 처음 목회자로 서원했을 때의 그 순수한 열정이라고. 미국에서의 삶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지라, 어느 순간부터 생존의 문제로 씨름하다가 삶의 길을 잃어 버린 것 같아 고민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래도 이런 사람들은 진실한 사람들입니다.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틀어져 버리고 깨어진 것들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고, 경제적인 능력을 회복하고 싶고, 영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들이 누구에겐들 없겠습니까?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는 본인이 번 아웃과 탈진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마음 속에 3가지 영역의 계기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육체적인 계기판, 영적인 계기판, 감정의 계기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체로 잘 보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들이 바로 감정의 계기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영성이라는 것과 감정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 것입니다. 감정이 어그러지면 마인드에 문제가 생기고, 생각에 문제가 생기면 영적으로도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정의 문제가 더 크게 삶과 영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건강한 감정이 회복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상태를 잘 돌봐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시험은 주로 우리의 감정의 문제들 때문에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 보면 상한 감정의 문제를 잘 다스리지 못해서 육체가 병들고,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민수기 21장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 사건이 등장합니다: “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만 따라나오면 금방 무엇인가가 될 줄 알았습니다. 애굽의 종살이와는 다른 파라다이스가 열릴 줄 알았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널 때까지만 해도 이 바다만 건너면 신세계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부닥친 현실은 그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자꾸 일이 꼬여만 갔습니다. 땅은 척박했으며, 그들을 환영해 주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애굽에 있었으면 더 나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자신들이 처한 환경이 모두 싫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불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척박한 광야에서 불평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이민자들이 직면한 삶이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이듭니다. 저도 꿈에 부풀어서 미국에 왔습니다. 아침에 신성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공원 길을 거닐고, 밤 하늘 여기저기서 반짝거리며 날아다니는 반딧불들을 바라보고, 난생 처음으로 개울가에서 비버와 마주쳤을 때의 신비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몇년이 지나고 나면 무엇인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서 잠을 설치기도 했건만, 정작 우리 이민 사회의 현실은 제가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이런저런 뜻하지 않는 일로 문제가 생기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틀어질 때면 삶이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다보니 예기치 않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생각이 막히고, 마음이 막막해져서 정상적인 생각을 못하게 되고,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다 마음이 상해서 생긴 일인게지요. 특별히 요즘은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인해서 이민자의 삶이 더 어렵습니다. 게다가 아이들이라도 잘 되고 비즈니스라도 잘 되면 그나마 위로가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마음이 더 상하고,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상했을 때의 문제는 현실을 극복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불평을 한 것입니다. 모세를 불평하고, 하나님을 불평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서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사람들은 어려운 현실을 만나면 두 가지로 반응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현실을 도전의 기회로 삼아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현실에서 도피하고, 현실을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어진 현실을 도전의 기회로 삼지 못하고 원망한 결과는 더 큰 고난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불뱀을 백성들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생각과 달리 뭔가 자꾸 꼬여가는 현실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무런 해결책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뱀을 동원하여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었으며, 뱀에 물려 죽을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란 게 그렇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을 믿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면, 기회가 오지만,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현실을 불평하기만 하면 가망이 없어집니다. 주어진 현실은 우리를 더욱 더 피곤하게만 할 뿐이고, 우리에게 더 큰 부담일 뿐입니다. 현실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면 원망할수록 현실은 우리를 더 고통스러운 현장으로 이끌어갈 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주어진 현실이 고달파도 현실을 원망하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과 함께 걷기로 작정했다면 믿음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돌파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참된 영성이란 주어진 현실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어진 현실에서 영적인 열매를 맺는 것이 영성 깊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실에 뿌리를 두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예수님의 영성이고, 예언자들의 영성이요, 참된 기독교 영성입니다.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삶의 현장과 유리된 영성은 온전한 기독교 영성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꼬일 때 누군가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모습을 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온전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때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척박한 광야로 몰아가셨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의 척박한 삶도 자꾸만 우리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려고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회개와 순종의 결과였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고, 주변의 환경을 원망했건 것들을. 오늘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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