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스러움이란 말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긴 생머리, 날렵하고도 하얀 손, 손톱을 연분홍색으로 물들인 손가락, 긴 치마 밑으로 사뿐히 내려 밟는 반듯한 발걸음,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 긴박한 상항 속에서도 숨 한 번 고르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침착성, 봄바람 같은 보드라운 향기, 꽃봉오리를 터트리려고 간지럽히는 햇살 같은 애교, 적절한 시간에 보석처럼 귀하게 떨굴 수 있는 눈물이 있다. 철따라 자신과 남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센스 있는 옷차림이 있는가 하면,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여자의 특별한 권리인 여우짓도 있다.

내게 여성스러움은 환상이요, 인연이 없는 단어이다. 여자인 내가 그런 특징을 발휘하며 살지 못하기에 억울하기도 하지만 정작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바로 가족임을 알고 있다. 이런 여성스러움이 때론 재치가 되어 가족의 어려움도 줄일 수 있고 부부의 금실도 더 돈독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우같이 슬기롭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생각만 해도 남편들의 마음은 뛸 것이다.

6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지만 내가 자랄 즈음엔 두 언니들은 이미 출가를 한 터여서, 나는 밑으로 세 명의 남동생들을 거느린 대장이 되어 남자놀이만을 즐기며 자랐으니 어쩌면 남성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활달하고 까불기 좋아하는 성품으로 성장해서 보는 사람들이 여인이기보다는 천진한 소년 같다고 했으니 여성스럽지 않음은 자타가 공인을 한 듯하다.

가지지 못한 것을 탐하는 마음은 더 크다 했던가. 여성적이고 얌전한 친구들을 만나면 부러웠지만 그 멋진 영역에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었다.

내 나이가 노인이라고 할 수 있는 60이라는 숫자에 가까워지자, 더 늙기 전에 여성스러움의 신비와 환상에 도전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머지않아 며느리와 사위도 생길 텐데, 어른으로서 품위를 갖추어야 했다. 육십 가까이 살면서 몸에 밴 언행이나 맵시가 어찌 삽시간에 바꿔질까만 다부진 각오로 할 수 있는 것부터 실행해 보기로 결심을 했다.

거칠어진 손을 관리하는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열심히 크림을 바르려고 노력했다. 즐겨 입던 청바지도 불편하지만 얌전한 정장바지로 바꿔 입기로 했다. 군인의 행군 같았던 걸음걸이대신에, 무릎과 무릎이 서로 맞닿게 그리고 천천히 걸어 보기로 했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 할지라도 침 한 번 꿀꺽 삼키고 몇 초라도 마음을 고르려고 해봤다. 식탁 위에 이따금 꽃도 꽂아 보자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지만 한두 번 하다가 다시 옛 버릇으로 돌아가 버렸다.

굳어 버린 습성은 고쳐지지 않는데 괜한 헛수고였구나 싶어서 한숨짓는 내게“그냥 생긴 대로 살아라. 사람이 바뀌면 죽을 때가 된 것이다”라고 친구들까지 포기를 권유했다. 스트레스를 자초해가며 이 어려운 훈련을 왜 하고 있는 걸까 하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이왕 결심했으니 몇 가지는 건지고 싶었다. 생각이 날 때마다 할 수 있는 일에 정신을 쏟았던 몇 달이 지났다.

눈이 오지 않는 지방이지만 오래 살다보니 겨울은 춥기만 했다. 두껍고 어두운 색의 옷으로만 겨울을 보냈다. 봄이 되자 옷장 속에서 오랫동안 외출하지 못하고 있던 밝은 색의 옷들이 내게 눈치를 주며 투정을 부리는 듯했다. 그 중에서 자줏빛의 짧은 에이라인 스커트와 라일락빛 블라우스와 재킷을 꺼내 입고 교회를 향했다. 오랜만에 크림색의 구두까지 맞춰 신고 나니 마음과 발걸음이 가벼웠다.

산뜻해진 마음에 훈련했던 걸음걸이로 사뿐사뿐 걷고 있는 내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봄은 여자의 계절이라더니 봄을 맞이한 옷 색깔 하며 맵시가 뒤에서 보니 영락없이 방년 꽃띠 아가씨로구먼. 저 조신한 걸음걸이 좀 봐, 언제부터 저이가 저런 예쁜 걸음을 걸었나!”

어머나! 여성스러운 내 걸음걸이를 칭찬하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훈련했던 일 중에서 걸음 하나는 건진 듯했다. 이렇게 훈련을 해나가다 보면, 머지않아 내 속 어딘가에 숨은 채 일생동안 튀어 나올 기회만 엿보고 있던, 보드랍고 포근하고 매력적인 여인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정취가 봇물처럼 터져서 흘러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여성의 매력이 퐁퐁 넘쳐나는 노인이 되고 말 것 같은 예감에 가슴이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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