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처럼 향수병을 들었다. 고개 숙이면 턱이 닿는 부분에서 아래로 손가락 한 매듭쯤. 칙~ 하고 뿌렸다. 짧은 줄의 목걸이가 내려 앉을 만한 바로 그 자리에 콩알 크기의 젖은 자국이 보이면서 산뜻하고 단정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하루 종일 고개만 숙이면 이 냄새가 나를 즐겁게 해줄 것이다. 오직 한 사람, 나만을 위한 향내이다. 세상을 채우고 내 주위를 둘러싼 냄새들은 내가 알 바 아니다. 고개 한 번 까닥하고 숙이면 어떤 느끼하고 기분 나쁜 냄새가 난다 할지라도 보호해 줄 나의 하루분 향기가 내 코 아래 있기 때문이다. 키가 백육십 센티미터가 넘고, 제법 실팍한 내 몸 어떤 부분에서 불쾌한 냄새가 난다 해도 괜찮다. 이 보호향이 나를 만족시켜 줄 테니까. 향수병을 놓으면서 향수 한 방울이 주는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갔다. 해님은 어느 사이에 중천에 올라와 있었다.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을 자랑하는 캘리포니아, 계절을 가리지 않고 햇빛은 강하기만 하다. 그 빛 속에 한 시간만 나가 있어도 여지 없이 온 얼굴과 목에 두드러기가 나고 만다. 가렵고, 따갑고, 화끈거리는 힘든 시간이 지나면 얼굴을 사방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쓰라리기 시작한다. 회복하기까지 몇 주가 걸린다. 몇 번의 경험끝에 햇빛 알레르기라는 것을 알았다. 강한 햇빛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피해야 한다. 알고 난 후에는 문제가 없다.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모자가 있으니까. 아무것도 덮지 못하고 오직 한 조각 그늘로 내 얼굴밖에 덮을 수 없는 모자를 눌러쓰고 밖으로 나갔다. 꽃들과 나무들과 인사를 나누며 햇빛 속을 활보했다. 포플라 나뭇잎에 짜글거리는 빛도, 마른 땅 검불위에 내리 쏟아지는 빛도 난 모른다. 모자의 챙이 있어 아무 괴로움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작은 모자의 위력은 대단하기만 했다. 대낮에 눈 들면 어디든지 퍼져 있는 그 많은 햇빛을 손바닥 만한 크기의 챙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나를 돌아봤다. 향수 한 방울과 작은 모자 하나가 하루의 생활을 지켜 주었다.

타고난 성품이 나약한 나는 주님께서 주신 말씀 중 어느 하나도 지키기가 쉽지 않다. 그 좋은 말씀들 앞에서는 반성하고 따르리라 굳게 마음먹지만 곧 잊고 만다. 예배 시간에도 구구절절 내게 필요한 말씀들뿐이다. 받아 적고 결단을 하지만, 역시 얼마 가지 못한다. 내 이런 부끄러운 고백에 김연아 선수는 한 번의 대회를 위해 만 번의 연습을 한다며 실수의 연속일지라도 훈련밖에 없다고 격려해 주신 분도 있지만 덤비기가 쉽지만은 않다.

절망하는 마음에 향수와 모자가 주었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 많은 것을 한꺼번에 고치는 것은 무리다. 한 가지 훈련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 모자의 챙과 향수 한 방울같이 작은 것,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쉬운 것 하나를 찾아 보자.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마음속에 넣어 주신 평강의 증거로 나오는 미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에 가득 피우고서 천 날도, 백 날도 아니고, 열흘도 아닌 하루를 살아 보자는 생각이 홀연히 올라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실행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각오를 해봤다. 쫓기는 시간에 신호등이 나를 막아도 화내지 않을 것이다. 아니 미소 지을 것이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도 웃을 것이다. 밀려 있는 일이 몸을 지치게 할지라도 난 모른다. 웃는 것밖엔. 손님이 억지를 부리고 욕을 할지라도 난 괜찮다.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도 작은 모자가 만들어 주었던 그늘처럼 내겐 웃음이 있을 테니까. 남편이, 또 아이들이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해 주지 않고 생떼를 쓴다 할지라도 상관이 없다. 고개를 팍 숙이면 콧속으로 들어오는 향수 같은 미소를 하루종일 짓기로 한 결심이 거기 있으니까.

지친 얼굴, 슬픈 얼굴, 화난 얼굴을 만날지라도 반갑게 맞을 것이다. 오늘 하루 얼굴을 몽땅 미소에게 내어 주리라 결정했으니까. 만나는 누군가의 마음으로 스며들어 잠시라도 피로가 녹고, 위로가 되며, 평강을 찾아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