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한 사건을 묵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흥분한 유대 군중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인을 끌고 예수님이 앉아있는 광장으로 나왔습니다. 이 여인은 군중에 의해 처형되기 직전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하여 질문했습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이때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땅에 무엇인가를 쓰시다가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야수적인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 유대 군중들은 이 말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하나 둘씩 떠났습니다. 광장에는 예수님과 이 여인만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저도 이 여인의 심정으로, 성난 군중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심정으로 그 여인이 끌려나왔던 광장으로 들어가 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이 여인과 군중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측은지심의 마음, 긍휼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한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모양으로 종교적이 된다는 것, 즉 어떤 방법이나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을 어떤 종교적 존재(죄인, 참회자, 성자)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한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인이 가장 존경하는 신학자 본회퍼의 말입니다. 한스 킹이라는 독일의 신학자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김경호 목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특별한 도덕성을 갖는 인간이 아니라 가장 보편적인 인간, 가장 평범한 인간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인간, 살과 피가 있어 그 살과 피가 요구하는 보통의 인간의 분노와 보통의 인간의 의리를 지킬 수 있는 인간미를 가진 그런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철저하게 인간이 되는 것”, “인간성을 잃지 않는 것” 김경호 목사의 설교를 읽다가 생각이 머문 내용입니다. 야수적인 본능에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 본능을 통제할 수 있는 인간, 내가 살자고 남을 짓밟거나, 남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차마 지나칠 수 없어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사람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가지고 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겠지요.
다신 한 번, 제 자신에게 질문해 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인간성은? 나는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인가? 과연 누가 “나는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만은 이 질문 앞에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때때로 참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에 흔들린 적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계속 되는 질문에 김경호 목사의 말이 어떤 답을 제공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의 자리를 벗어나도록 요구받을 때, 바로 그 때도 가장 평범한 인간 만큼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살다보면 수십번 인간으로 살수 없게 만드는 상황 속에 처하게 되지만 그때에도 우리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특별한 인간이 아니고 믿음과 사랑을 가진 인간, 따뜻한 피가 통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하루에도 몇 번 인간으로 살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그 순간에도 인간으로 남아 있으려는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서야 한다.”

너무나 상식적이면서도 너무나 도전적인 말씀입니다. 사람이 원한이 사무치면 몇 번씩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야수적인 본능에 따라 살고픈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자신의 이익과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명분 때문에 자신의 야수적인 본능을 합리화시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 댓글들을 보면 얼마나 잔인한 말들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가장 공적이어야 할 언론마저 이런 일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따뜻한 인간성을 잃지 않는 한 사람으로 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특히 본회퍼와 한스 킹이 청소년기에 처해 있었던 독일의 상황은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간성을 지킬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철저히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실존적인 고백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당시와 같이 처참한 상황은 아니지만, 우리 인류가 직면한 인간성 상실의 위기는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수께서 보여 주신 참된 인간상을 바라봅니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향하여 이성을 잃고 냉혈하게 처형하는 마음으로 돌을 들었던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는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의 인간성을 일깨워 주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당신들도 연약한 인간임을 잃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야수적인 본능으로 흥분했던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예전에는 이 군중들의 반응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에 다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마음뿐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받은 군중들의 반응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 있는 인간들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웬만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안 받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파괴시키고 상처주는 행위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이 더 큰 소리를 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돈이 우상이 되어서 상대방의 고통에 눈을 감아 버리는 행동들이 얼마나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합리화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얼마나 버젓이 저질러지고 있습까? 양심이 죽어가는 이 시대에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살아 있는 양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따뜻한 인간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책임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양심이 살아 있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아프다고 신음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옳지 않은 길이면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책임성을 지닌 인간이 가야 할 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입니다.

예수께서 당대에 도덕적으로 가장 뛰어난 부류에 해당되는 바리새인들을 비난한 것도 이와 관련하여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율법 수호라는 명분 때문에, 도덕적인 자부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관용해 주고 품어 줄 수 있는 인간미를 잃었버렸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은 종교 안에 갇혀 인간성을 상실해 버린 그들을 향해서 참 인간이 되라고 도전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위선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그들이 너무나 종교적었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종교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은 위선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극단적인 상황이 와도 그 인간성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시대의 빛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간다운 사람으로, 가슴 따뜻한 인간으로 온전히 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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