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우리 사회의 이슈들을 살펴보면 실업문제, 에너지 문제가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올해는 긴 장마와 무더위 탓인지 그 어느 해보다 전력난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여름철 에어컨 실내 온도를 1-2도씩 올려서 엔너지를 절약하기 위해서 애를 써보고 있지만, 전력난을 쉽게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한국에서는 원자력 발전소의 필요성이 다시 재기될지 모른다. 좀 더 풍족한 에너지를 사용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대량의 에너지를 공급해 줄 수 있는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가끔씩 몇몇 과학자들이 미국을 예로 들어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의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비양심적이다. 비행기로 6시간 걸려서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할 수 있는 미국이라는 광활한 땅을 고려하지 않는 언급이기 때문이다.  

지난 21일 영국 BBC 보도에 따르면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 지 2년이 지났지만 방사선 오염수 유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심화되고 있으며, 후쿠시마 원전이 완전히 복구되려면 30~40년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원자력 발전소의 문제의 심각성을 다시 경고하고 있다. 에너지 문제를 수월하게 해결해 보려고 건설했던 원자력 발전소가 부메랑이 되어 일본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 취업난 역시 매우 심각하다. 20대 젊은이들의 취업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40대 후반의 실업자 역시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한국사회는 급격하게 가정이 해체되어 가고 있다. 이제는 평생을 책임져 줄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으며, 사회는 점점 양극화되어가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의 세계를 지탱해왔던 세계 경제구조가 한계에 달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인간의 탐욕을 끝없이 지탱시켜 줄 것 같았던, 이 세계가 한계에 직면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요즘 대두되고 있는 말이 지속가능한 성장이다. 이 말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지탱되어 왔던 경제성장구조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요즘 이 말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세계적인 경제 성장의 한계가 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의 번영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세계화는 미국화를 의미하고 있는데, 이 거대한 미국 시장의 유통망은 과도한 에너지 소비를 토대로 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시장 구조가 우리 사회의 소비 구조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소비 구조를 지탱하기 위한 거대한 세계 경제 구조가 과도한 에너지를 소비하며 비틀거리고 있다.  소비는 무엇보다 인간의 끊임없는 탐욕을 정당화시켜 주고 있으며, 우리에게 편리함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매력이 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극복되지 않는 한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을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소비를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을 만큼 이 세상은 여유롭지 못하다는 데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 유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진보와 객관성을 강조하는 과학자들은 왜 이 지구가 유한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이 세계의 불평등 구조를 외면한 것일까? 어쩌면 자신들의 이익에 대한 관심 덕분에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레미 레프킨이 [바이오테크시대]라는 책에서 말했다. 진화론은 객관적이고 자연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사회과학적인 산물이라고. 모든 사회구조는 그것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철학적인 근거가 필요한데, 진화론은 양육강식의 자본주의 사회를 정당화시켜 주는 이론이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객관적인 사실처럼 지지받고 있다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론이다.
우리 사회가 성경적인 창조론을 받아들이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온 천하보다 한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것을 독식하려는 대기업들은 도전받을 수밖에 없고, 지구의 유한성을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편리만을 추구하는 무분별한 과학 기술의 개발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주류사회는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적인 강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양육강식의 논리를 정당화시켜 주는 진화론이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윤리적인 논쟁을 야기시킬 수밖에 없는 유전공학과 같은 과학기술도 진화론을 바탕으로 해야 그 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소비사회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자본주의적인 구조는 끊임없이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고 있다. 솔직히 우리에게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인간 본성은 남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있으면 기분이 좋고,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갖지 못할 때 불행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우리가 직면한 환경문제는 구조적인 문제이며 인간 본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전기 좀 절약하고, 쓰레기 좀 분리 수거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삶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스며들어 있는 소비에 대한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탐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인간의 죄성이 극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에릭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보면 존재적인 삶의 방식과 소유적인 삶의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두 편의 시를 소개한다. 하나는 19세기 영국의 시인 테니슨의 시이다: “갈라진 벽 틈새에 핀 꽃이여, 나는 너를 그 틈으로부터 뽑아낸다. 지금 나는 너를 뿌리째로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이여, 그러나 <만일> 내가 네가 무엇인지, 너의 뿌리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때  나는 신(神)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으리라.” 에릭 프롬에 따르면, 이 시는 소유적인 삶의 방식을 대표한다. 다른 하나는 일본 시인 바쇼의 하이꾸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냉이꽃이 피어 있다, 울타리 옆에!” 이 시는 존재적인 삶의 방식을 대표한다.

에릭 프롬에 따르면, 소유하는 삶의 방식은 불가피하게 그것을 파괴하게 되어 있으며, 존재하는 삶의 방식은 그것을 파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즐기면서 창조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둘러보자!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들은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이다. 푸른 하늘, 맑은 숲, 따스한 햇쌀, 신선한 공기, 여기저기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화초들까지 내가 소유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그것을 소유하지 못했다고 불행해 하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가?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가?

기독교 영성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소유적인 방식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소유적인 삶의 방식을 초월해 보는 것이 기독교적인 영성의 출발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길이다. 우리가 에너지 문제, 실업 문제, 지구 환경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이론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변화되어야 한다. 이 세상을 거침없이 살다간 예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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