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금 조심스러운 주제를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그냥 떠올리기만 해도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금기시해야만 할 것 같은 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성은 부정적인 면으로만 치우쳐 인식되어 왔습니다. 특히 종교나 신학을 논할 때면 반드시 거론되는 필요악 같은 이미지가 바로 이 성입니다. 과연 성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악의 상징일까요?
우리는 성에 대한 편견을 갖게 만드는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삶 속에서 들려오는 욕지거리들조차 성에 대한 이런 편견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각국의 대표적이고 대중적인 욕들을 살펴보면 이상하리만큼 성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얼마만큼 성이 인류사회 속에서 저속하고 불경한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지만 이렇게 성을 매도하기만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깊숙이 자리잡고, 행해지는  성생활들이 단순히 악한 것일 뿐일까요? 어쩌면 성생활을 은밀한 가운데 행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우리들은 성과 전혀 무관한 것인 양 숨기면서, 타인들의 것을 힐끔힐끔 엿보며 비판하고 질책하고 손가락질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사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권리이자 의무였습니다. 바로 성은 신이 인간에게 준 소중하고 의미있는 선물이었다는 말입니다. 선물이라면 그것도 첫번째 받은 선물이라면 목숨과 같이 생각하며 귀하고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지 않을까요? 신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셨을 터, 그렇다면 기념비적이고 자랑할 만한 것이지 않을까요? 수치스럽고 감추어야 하는 것을 선물로 주셨을 리가 없습니다. 만약 그게 수치스럽게 느껴진다면 받은 자들이 왜곡하고 감추려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름다워야 할 하나님의 첫 선물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전락했을까요? 신학적으로, 성의 타락은 인간의 죄에서 시작됩니다. 즉 인간의 교만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적 마음과 스스로를 높이고자 하는 우쭐함의 결과가 엉뚱하게도 아름답고 거룩해야 할 성으로 옮아가 버렸습니다. 죄로 인해 모든 인류의 권력 다툼과 전쟁, 계급과 불평등, 성차별과 인종의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죄에 의해 인간의 사회체제나 사고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자, 성의 개념은 이상하리만큼 뒤틀리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꾸며지게 되었고, 이렇게 왜곡된 모습이 우리 삶에 반영되었습니다.

원모습은 아름다우나 만들어 놓은 체제의 강요에 의해 숨겨야만 하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변질된 성처럼, 얼굴을 가려야 하는 전통, 발을 가려야 하는 풍습 등 가리고 숨겨야 할 문화가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어두운 곳으로 자꾸 내몰리게 되면 아무리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이라도 어둡고 스산하게 변화하고 맙니다. 밝은 빛 아래서 정상적인 발전이 불가능해지고 부정적이고 추하게 변질되고 맙니다. 지금 우리가 접하고 인식하는 성은 바로 이렇게 변질된 성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만 해도 수치스러워지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입니다. 귀한 하나님의 선물이자 우리의 권리가 부끄러운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부끄럽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되고 신성모독적인 표현입니까? 이젠 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올바른 적용이 필요합니다. 성을 밝고 환한 양지로 끌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미셸 푸코는 그의 저서 <성의 역사>에서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선 “성이 왜 억압당해 왔는가? 만일 성의 억제로 인한 구속이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주위의 많은 지식과 제도와 지침들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믿고 있는 신념들의 근원과 자료를 되짚어 보면, 많은 오류들이 산재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몇몇 권력자들의 이익과 자존심을 위해 치러지는 국가간의 전쟁에는 그럴 듯한 명분이 붙어 있지만 그 명분이 전쟁 자체를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명분은 단지 명분일 뿐 진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명분을 자위의 수단으로 삼아 모든 전쟁 참전자들과 가족들은 고통을 견딥니다. 명분은 이들에게 신념이 되어 그들의 삶을 지탱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이 됩니다.

하지만 명분은 만들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약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영구한 진리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명분을 만들어 낸 권력자(정치가, 지식인, 명령통솔자)들만이 이러한 고통에서 제외되고 그 수혜만을 맛봅니다. 엄밀히 말하면 전쟁의 목적은 진실이나 정의보다는 특정 집단이나 특정 국가의 이익을 위해 명분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인류의 사상과 제도, 심지어 윤리, 도덕의 체계까지도 전쟁의 경우처럼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파생되고 권력자들의 힘과 지식에 의해 명멸을 거듭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있는 이론이며 연구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푸코는 성에 대한 담론을 이야기하면서 인류 역사에서 성에 대한 편견이나 타부(Taboo) 역시 이런 권력과 지식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만들어진 명분에 스스로를 얽어매어 전통으로 이어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명분에 힘을 실어준 사회적 체계로는 가부장적 제도에서의 남존여비사상, 각종 종교에서 주장하는 영존육비사상, 그리고 이런 사회적, 문화적 제도를 보존하고 학습시키는 각 시대의 교육제도들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남성위주사회에서 최고의 선은 항상 남성과 관련지어져 있습니다. 남성은 완전함의 상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은 상대적으로 열성으로 취급되고 최고의 선이나 완전을 지향하려면 열성과의 접촉은 금기시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의 가치는 더욱더 폄하되고, 사회적으로 입지가 좁아질 뿐만 아니라 불완전의 상징이 되며, 이로 인해 악 자체는 아닐지라도 악으로 이끄는 통로나 원인 등으로 인정됩니다.  

또한 영지주의와 같은 종교사상은 영과 육을 이원론적 사고체계로 바라보게 하며 영은 선, 육은 악이라는 공식을 도출하게 했습니다. 이로써 육으로 행해지는 모든 일들 역시 열등한 일들로 취급되며, 이런 육의 개념에 속한 성 또한 저속하고 불경한 일의 대표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내용들은 교육제도로 봉인되고 성문화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주입되어 온 것이라고 푸코는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가치체계 속에서 절대 선과 절대 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공존하며 서로 얽혀 있다고 표현해야 더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봉인되고 성문화되어 굳어져 버리면 그때부터 맹점은 숨겨지고 오히려 왜곡되어 장점으로 소개되기까지 합니다. 혹시 우리들이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성에 대한 생각도 이런 과정으로 왜곡되고 숨겨지고 외면당하진 않았을까요? 푸코의 입장이 성의 모든 역사를 대변한다거나, 성에 대한 완벽한 이론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토록 오랫동안 성을 무시하고 죄로만 느끼게 하기 위해 수천 년 동안 이용되어 온 그 모든 인간제도의 장치들을 숙고해 보고, 비판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참 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바른 이해를 통해 성에 내재되어 있는 옳고 그른 점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성은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감사의 또 다른 대상으로 우리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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