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담감을 갖는 부분 중 하나가 헌금생활일 것입니다. 게다가 얼마 전 한국의 주요교단 중 한 곳에서 십일조를 직분자들에게 의무화하겠다는 소식이 들려와 헌금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감이 부담으로 다가올 것도 같습니다. 물론 신앙에 적절한 부담감은 어느 정도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있지만, 이런 강제적 방법은 아무래도 헌금에 대한 편협한 생각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글로 ‘헌금’이라고 하면 왠지 화폐적 의미에 치중되는 듯한 느낌을 받기 쉽지만 영어인 ‘Offering’을 살펴보면 그 전체적인 느낌이나 근원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더 쉬워집니다. 그 사전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행위의 통칭이라고 했고, 종교적 예배와 헌신의 행위로서 신에게 드리는 모든 형태를 총칭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종교적 제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헌금의 의미가 돈에 국한된 듯이 보이지만 사실 헌금의 의미는 돈의 의미뿐 아니라 더 큰 영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제사형태는 동물희생의 형태로 알려져 있지만 문화 인류학적으로 인간희생제(Human Sacrifice)가 훨씬 선행한다고 합니다. 문화가 발전하면서 인간희생이 동물희생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성경을 포함한 여러 문헌을 보면 동물희생제에서 행해지는 제사 의식에서 가장 보편적인 절차 중 하나가 안수(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 절차입니다.

안수는 두 가지의 의미로 시행됩니다.  첫째는 성경에도 나오듯이 제사를 드리는 주체의 모든 죄를 대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안수의 절차를 통해 내 안의 모든 죄를 희생물에게 전가한다는 뜻입니다. 속죄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두번째는 주체자의 모든 능력과 힘을 부여한다는 의미입니다. 목사 안수식 때 선배 목사들이 새내기 목사에게 안수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러한 안수의 의미는 제사 주체자의 선과 악 모든 개념을 희생제물에게 넘겨 주는 것으로 제사의 제물은 주체자와 그 집단 자체를 의미합니다. 비록 동물희생으로 대체되었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인간희생을 기본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헌금의 가장 기본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스스로를 신께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시간, 건강, 재물 등, 내게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가 현대에는 헌금 시간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현대 생활과 비교할 때 과거 제사의 모든 절차는 복잡하고 번거로웠습니다. 이런 문제를 화폐로 대체한 것이 바로 헌금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금전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삶의 수단이며 방편이라는 의미만으로도 함축적으로 제사의 모든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체, 즉 돈을 드리는 것만이 헌금의 진정한 의미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돈을 통해 나의 마음을 신께 드린다는 것은 헌금, Offering의 극히 부분적이며 상징적 해석일 뿐입니다.

헌금으로 인해 어려움과 분쟁을 겪는 교회나 교단들이 있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과 각 성도들의 약속이자 대화의 모습으로 극히 개인적인 영적 관계인데, 아마도 겉으로 드러난 헌금의 액수나 횟수를 보며 상대의 신앙을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죄 때문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일단 상대의 헌금생활을 놓고 상대를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은 교회 내에서 어떠한 직급에 해당하든지 스스로가 교만함을 드러내는 죄악이 될 수 있고, 이로 인해 교회의 분열과 화해를 방해하는 성령훼방의 심각한 죄를 짓게 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헌금의 올바른 이해는 우리들 삶 속에서 예배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며 삶 자체의 변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또한 이러한 열린 마음으로 인해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분의 섭리를 훨씬 더 쉽게, 그리고 자주 접하게 될 것입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