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접시 위에 진녹색 송편 네 개가 놓여 있다. 투박한 반달 모양의 주먹만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모싯잎 송편이다. 한 입 베어 물면 과연 어머니께서 쪄주셨던 그 모싯잎 냄새가 묻어날까? 얌전한 새색시 입술처럼 앙다문 끝부분, 그 아래 도톰한 뱃속에 굵직한 통 돈부 몇 알이 고물로 들어 있을까? 차지면서도 쫄깃하고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날까?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물도 바가지로 퍼주었던 시골 아낙네의 인심처럼 실팍한 이 송편에 포만감이 간직되어 있을까? 3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와 만난 내 고향의 모싯잎 송편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덥석 베어 물지 못하고 향수에 젖어 본다.

연휴가 낀 주말에 남편과 함께 여섯 시간을 운전하고 오랜만에 LA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국식품점을 찾았다. 넓은 식품점 주차장 한쪽을 온통 차지한 텐트에는 ‘한국직송 전라도 특산물 특별 판매’라는 큰 글씨가 내 발길을 잡았다. 정신없이 뛰어간 그곳에서 각종 젓갈과 미역, 멸치, 굴비 등 많은 건어물과 토란대, 고구마줄기, 호박오가리, 산만큼이나 쌓인 말린 나물들을 지나자 다소곳이 줄지어 비닐봉지에 포장되어 얼음이 있는 진열대 위에 살포시 앉아 있는 것이 있었다. 맑은 비닐 속에는 엷은 안개가 끼어 있었지만, 난 확인하고 말았다. 오랜 세월 동안 잊고 살았던 송편, 어릴 적 추석이면 샘가에 있는 모싯잎을 한 잎 한 잎 뜯어다가 만들어 주셨던 울엄니의 송편이었다.

울엄니의 송편은 언제나 주먹만했다. 아니, 내 고향의 송편 크기는 다 같았다. 나는 당연히 송편은 다 그렇게 생긴 줄 알았다. 자라서 도시 친구들의 집을 방문한 뒤에야 세상에는 앙증맞고 귀여운 송편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추석 무렵,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오면 제일 큰 걱정이 투박하고 볼품없는 송편이었다. 한 번은 엄마한테 우리는 왜 예쁜 송편을 못 만드나 하고 항의한 적이 있다. 어머니의 대답은 작고 예쁜 송편을 만드는 것은 집에서 시간의 여유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농사일로 정신없는 시골에서는 음식에 멋을 낼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고향을 떠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투박한 송편, 열심히 살았던 증거가 만든 어머니들의 솜씨를 그대로 갖고 있는 송편 봉지를 덥석 집었다. 이것을 만나려고 굳이 필요한 것도 없는 이곳에 들렀던 것이구나!

제조원 : 전남 영광군 영광읍 신하리. 내 입에서 혼잣말이 자꾸 나오고 있었다. ‘맞아! 신하리는 내가 학교 가느라 아침저녁으로 지나치던 동네야!’ 동네 입구에 커다란 팽나무가 있었고 넓은 신작로 넘어 들판이 바라보이던 동네였다. 내 친구 S가 아직도 살고 있다는 곳이다. 이 송편을 빚은 사람도 내 친구 S와 같은 동네서 살겠네. 이 비닐 포장지도 내 고향 사람들의 눈길과 손길을 받았겠네. 머리에 수건을 쓴 아줌마들이 올망졸망 모여 앉아서 빚었겠지. 그리고 먼 길을 떠나려고 냉장고에 들어가서 몸을 꽁꽁 얼린 다음에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또 시간들을 보내며 냉동 컨테이너를 타고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와 LA 한국식품점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겠지.

나도 너를 만나려 30년의 길고 긴 세월을 돌고 돌아 캘리포니아 북쪽에서 남쪽까지 밤을 낮 삼아 운전하여 여기 이 주차장까지 온 것이겠지? 안도현 시인이 산서 장날 어물전 상자 속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부안산 조기를 보고 300리도 넘는 부안에서 산서까지의 길을 짚어봤듯이 어느새 나도 우리들의 길을 헤아리고 있었다.

뜻밖의 장소에서의 뜻밖의 해후로, 얼음 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듯한 송편을 모두 가져오고 싶었지만 고작 몇 봉지를 주섬주섬 집어들었다. 돌아오는 여섯 시간의 운전길에 얼린 송편의 모양이 녹아서 흩어질세라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다시 채우고 에어컨이 나오는 차 뒷좌석에 실었다. 아이스박스조차 소중하게 여겨짐은 송편 탓이었으리라.

접시 위의 송편을 한 입 베어문다. 고스란히 있다! 그 맛! 마음으로는 손 뻗으면 닿을 듯한 그 곳, 꿈속에서 항상 가보는 그곳에서 만들어진 주먹만한 모싯잎 송편. 돌고 돌아 낯선 이국의 도시에서 만난 진초록빛 송편은 나를 데리고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고향과 울엄니의 솜씨와 맛을 고스란히 입안에 넣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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