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숙(일리노이)

“Hello! May I help you?”
너무나 그리웠던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조금도 변함이 없는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정작 전화를 건 내 쪽에서 그 목소리를 감상하느라 할 말을 잃었다. 참으로 그리웠던 목소리였기에......
언젠가 십자가가 내 삶 속의 현실로 다가들면서,  예배를 드릴 때에도 문득문득 눈에 보이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왠지 마음이 편칠 않았다.  십자가 앞에서 말할 수 없는 감동의 은혜를 늘 누리면서도, 막상 일상을 살면서 작은 갈등을 겪을 때에는 나만의 유익을 따라 행동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늘 주님의 명령이 떠오르곤 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
몇년 전 어떤 오해 때문에 다니던 교회를 나온 적이 있다. 나를 무척이나 사랑해 준 어느 집사님과의 오해 때문에 오랫동안 깊은 상처 속에 갇혀 있었다. 너무나 나를 사랑해 준 분이어서 그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분에 대해 아름다웠던 기억들만이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음을 느끼며 내가 그분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음도 깨달았다.
내 안에 무엇이 있길래 그분을 그리워하면서도 찾지 못하는 걸까? 스스로를 점검해 보니 그 잘난 자존심 때문이었다. 마침내 범인을 잡아내고 입으로 그분을 용서하겠다고 선포하자, 거짓말처럼 지난 몇년간 나를 가둬두었던 상처가 내면에서 치유되는 걸 느꼈다. 오늘 아침 그분과 통화를 하고나니 내 안의 기쁨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 같았다.
수많은 교회들 위에 세워진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진 탓일까.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개인적인 은혜를 누리지만, 십자가를 짐으로써 생성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여 하나님을 경홀히 여길 때가 너무 많은 것 같다.
무척이나 자존심이 강하고 시체말로 아쉬울 게 없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작년에 뜻하지 않은 작은 고난을 겪었다. 그녀는 고난이 준 유익을 넘치도록 받았다고 했다. 그녀나 나나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으나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친구에게는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다. 집안일로 시동생네와의 관계가 소원해져서 몇년째 왕래를 끊고 있었다. 고난을 겪은 이후, 열심히 주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고 새벽기도를 열심히 드리면서 은혜를 더해가던 친구는 왠지 자신의 모습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사람, 아니 피를 나눈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왠지 떳떳지 못한 행위 같아서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벗겨보니 자존심이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성령에게 도움을 청하고 용기를 내어 시동생네를 초대했고, 그 자리에서 사과하고 화해를 했다고 한다. 집안의 화목을 회복한 내 친구에게 “네가 진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께서 춤을 추셨을 거야”라고 말해 주었다.
왜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짓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생활 속에서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이 얼마나 영적인 사람인가를 깨닫는다.
지성은 하늘을 찌를 듯하나 인생은 시궁창이 되어가는 말세의 고통 속에서 나는 오늘도 내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그 십자가가 무겁고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잘 질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한다. 지금까지 그 십자가를 피하면서, 때론 의도적으로 외면하면서 살아온 내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는 방법을 알았기에 더 이상 생활 속에서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외면하거나 피하고 싶지 않다. 말씀을 통해 순종을 배우고, 말씀 안에서 삶의 형통함을 체험하고, 말씀으로 삶이 달라지는 이것을 생활 예배라 부르고 싶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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