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reamed a dream in time gone by(지나가 버린 옛날 나는 꿈을 꾸었어요)
When hope was high and life worth living(그때는 희망이 가득하고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었죠)
I dreamed that love would never die(사랑은 결코 죽지 않으리라 꿈꾸었고)
I dreamed that God would be forgiving(신은 자비로울 거라고 꿈꾸었어요)

But the tigers come at night(그렇지만 곤경은 한밤중에 찾아와요)
With their voices soft as thunder(그 목소리는 천둥처럼 부드럽지만)
As they tear your hopes apart(당신의 희망을 갈가리 찢어놓고)
As they turn your dreams to shame(당신의 꿈을 수치심으로 바꿔 버리죠)
 

 
영화 ‘레 미제라블’에 등장하는 팡틴이 부르는 노래 ‘I dreamed a dream’의 가사 일부입니다. 가난하다 못해 잔혹했던 그녀의 현실이 담긴 이 노래는 무척 감미롭고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하지만 가사 내용은 그녀의 삶처럼 아프고 서럽기 그지없습니다. 이 노래는 'Now life has killed the dream I dreamed.'(삶은 내가 꿈꾸던 꿈을 박살냈지요.)라는 내용으로 끝을 맺습니다. 
 
팡틴은 고아 출신으로 파리에서 재봉사로 일하다 불량한 대학생에게 버림받고 고향에서 여공 노릇을 하다 끝내는 매춘부가 되어 마들렌느(장 발장)의 진료소에서 죽은 불행한 여인입니다. 그녀의 노랫말에서 보듯이, 신은 자비롭다고 믿었지만 신이 만든 세계는 가난한 이들에게 너무나 잔인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마지막 피난처가 되어준 이가 장 발장이었습니다. 장 발장 역시 가난과 굶주림 때문에 한 조각의 빵을 훔치다가 붙잡혀 19년 동안 모진 감옥에 갇히는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장 발장은 팡틴의 딸 코제트와 그의 연인 청년 혁명가 마리우스를 희망처럼 여기며 보살핍니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그들을 바라보는 것 역시 힘든 일입니다. 결말에 이르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들의 삶이 애처롭고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소설의 원제목대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공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냥 불쌍한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그 안에 사랑이 있고, 희생이 있고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참하고 잔혹한 것들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출발점은 바로 미리엘 주교의 사랑이었습니다. 
 
은촛대
 
가석방된 장 발장이 자비로운 모트뢰이유 쉬르메르 시의 마들렌느 시장으로 시민을 돌보고, 가련한 코제트의 보호자로 살고,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마차에 깔린 노인을 구하고, 장 발장으로 오인되어 기소된 이의 결백을 드러내고, 평생 자신을 추적하던 지긋지긋하고 원수 같은 자베르 경위마저 결정적인 순간에 구해 준 이유는 바로 미리엘 주교의 자비가 그의 마음을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가석방된 장 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찾은 것은 그에게 문을 열어 준 곳이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장 발장의 통행증에는 "석방된 죄수, 태생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 ... 19년 동안 징역살이를 했음. 주택 침입 절도로 5년. 네 번의 탈옥 기도로 14년. 굉장히 위험한 자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스스로 개만도 못하다고 말할 정도로 장 발장은 가는 곳마다 멸시를 받았습니다. 미리엘 신부가 그를 식탁에 앉혔을 때 장 발장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자신은 식탁에 앉을 자격이 없다며 당혹스러워했습니다. 그때 주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신분을 밝히지 않아도 좋았소. 여기는 내 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집이오. 이 문을 들어오는 사람에게 일일이 이름을 묻지 않고, 다만 괴로움이 있는가 없는가를 물어볼 뿐이오."
 
정말 미리엘 주교는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상상의 인물처럼 느껴집니다. 주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주교관을 자신의 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집이라고 하였고, 장 발장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주교는 아무런 훈계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불쌍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훈계가 아니라 자비라는 것을 주교는 알았습니다. 장 발장이 새벽에 여섯 벌의 은그릇을 훔쳐 달아났다가 헌병에게 붙잡혀 왔을 때 주교는 "나는 당신에게 은촛대도 주었는데, 왜 은그릇이랑 함께 가져가지 않았느냐"며 오히려 장 발장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주교의 자비와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장 발장은 그 은촛대를 평생 간직했습니다. 그 은촛대가 장 발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장 발장은 그 은촛대를 볼 때마다 흔들리는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 마음에 은촛대 하나를 품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의 모범
 
미리엘 주교는 1806년 디뉴의 주교로 임명되고 나서, 사흘만에 자신의 대저택(주교관)을 조그만 뜰이 딸린 2층 건물인 자선병원과 맞바꾸었습니다. 그는 원장을 불러 말했습니다. "당신 병원에는 대여섯 개의 조그만 방에 26명이나 들어 있는데, 우리 세 사람은 60명이 들 만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당신이 내 집에 와서 살고, 내가 당신 집에 가서 살기로 합시다. 여기가 당신 집입니다."
 
주교는 국가에서 1만5천 프랑의 봉급을 받았는데, 자신을 위해서는 1천 프랑밖에 사용하지 않고, 모두 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마차 삯과 교구 순회비로 시에서 나오는 3천 프랑은 자선병원의 환자들과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주교는 관할교구의 결혼공시 면제, 결혼식, 영세,  강론, 성체 강복 등을 통해 들어오는 수입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정 많은 부자보다 비참한 이들이 더 많은 법이어서 주교는 언제나 빈털터리였습니다. 그럴 때면 주교는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 주었습니다.
 
"죄인은 죄를 저지른 자가 아니라 영혼 속에 그늘을 만들어 준 자"라고 말했던 주교는 위조지폐건으로 붙잡힌 어느 불쌍한 남녀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여자는 위조지폐를 처음 썼다가 붙잡혔는데, 공범을 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검사는 꾀를 내어 남자에게 다른 연인이 있다고 쓰인 위조편지를 여자에게 보여 주어, 질투로 눈이 먼 여자에게서 공범인 남자를 자백 받았습니다. 이 남녀가 중죄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주교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검사는 어디서 재판을 받습니까?"
 
그의 개인생활은 단순하며 장엄했습니다. 무엇보다 주교관에는 자물쇠로 채운 방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교는 자물쇠와 빗장 등을 모두 떼어 버렸습니다. 장 발장이 그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문이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성경 여백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사제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문단속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어느 사제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켜 주시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무리 지킨들 헛수고일 따름이오." 
 
자비의 첫 번째 증거
 
미리엘 주교는 자비의 첫 번째 증거를 청빈이라고 여겼습니다. 빅톨 위고는 그러한 주교의 처신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치한 생활을 하는 사제는 하나의 모순이다. 사제란 언제나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 노동의 먼지 같은 저 신성한 빈곤을 조금도 갖지 않고 어떻게 밤낮으로 일어나는 갖가지 불행, 갖가지 궁핍을 어루만질 수 있겠는가? 활활 타는 난로 곁에 있으면서 추위에 떠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용광로에서 쉴 새 없이 일하면서 머리카락이 그을지 않고, 손톱에 때가 끼지 않고, 한 방울의 땀도 흘리지 않고, 한 줌의 재도 얼굴에 묻히지 않는 노동자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가슴이 저리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제, 이런 목사가 몇 명만 있다면 우리의 교회는 오늘의 모습과 전혀 다를 것입니다. 비록 소설 속의 인물이지만 이런 모습을 상상만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는 작가는 위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성직자는 성직자 사회에서 소외되기 마련입니다. 혼자만 바르고, 혼자만 잘난 척하는 인간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됩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를 움직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미리엘 주교에게도 옛 소유물 중에서 사치스럽다고 할 만한 물건이 있었습니다. 장 발장이 훔쳐갔던 은그릇과 은촛대입니다. 그러나 벽장에 넣어 두었던 은그릇이 밤새 사라진 것을 처음 발견한 주방의 마글르와르 부인이 "그 놈이 우리 그릇을 훔쳐갔어요!"라고 전하자, 주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대체 그 은그릇이 우리 물건이었던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글르와르 부인, 내 잘못으로 우리는 오랫동안 그 은그릇을 갖고 있었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오. 그런데 그 사나이는 어떤 사람이었소? 가난한 사람임에 틀림없잖소?"
 
오늘날 청부론을 주장하는 목사의 교회는 근사한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조금 안다는 신학자들은 청부도 잘못된 것이지만 청지기론과 사도 바울의 자족의 비밀을 말하면서 청빈 역시 성경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미리엘 주교가 말하는 자비의 첫 번째 증거가 청빈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부자 되는 일은 세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가난해지는 것은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청빈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복음적인 내용이며 우리의 신앙은 그것의 실천 여부에 따라 진위가 갈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I dream a dream that cannot come true(실현될 수 없는 꿈을 꾸어 봅니다.)
 
팡틴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꿈을 꾸어 봅니다. 그 꿈은 어쩌면 이루어질 수 없는 꿈(I dream a dream that cannot come true.)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꿈 역시 팡틴의 꿈처럼 'Now life has killed the dream I dreamed.'(삶은 내가 꿈꾸던 꿈을 박살냈지요.)로 끝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란 모름지기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처럼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배우고 또 노력해도 그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레 미제라블’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희망입니다. ‘비록 미리엘 주교처럼 ’순도 높은 사랑을 실천할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장 발장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넘어질지라도 가슴에 은촛대 하나를 품고 산다면, 우리는 적어도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을 거라는 소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래서 꿈을 꾸어 봅니다. 그것이 비록 현실에 의해 박살나는 실현 불가능한 꿈일지라도 주님은 우리의 그런 노력과 태도를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연민과 자비를 가지고 다가갈 때, 미리엘 주교처럼 살아갈 때 복음은 비로소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얼어붙었던 장 발장의 상처투성이 마음을 녹인 것은 미리엘 주교의 자비였습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그러한 변화를 목격할 수 없는 것은 내게 그러한 자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 함께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영화나 소설 속이 아니라 세상의 한복판에서 자비를 경험하고 변화되는 성령의 역사를 꼭 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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