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의 피곤을 잊고 여유를 가져 보자고 선택한 이 영화의 잔상이 참말 오래 간다. 여러 날 지났는데도 머릿속이 조금 복잡하다. 인터넷 백과사전은 'The Reader(책 읽어 주는 남자)'가 독일의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쓴 자전적인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데이빗 헤어가 시나리오를 쓰고 스티븐 달드리가 감독한 2008년 영화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1995년 베를린, 결혼에 실패한 뒤 여성과 적당히 관계를 나누면서 고독을 달래고, 일터에서는 열심히 일하고, 장성한 딸과는 조금 서먹한 중년 변호사의 삶을 살짝 보여 준 뒤, 주인공 미하엘 베르크의 과거 회상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1958년의 어느날, 15살의 소년 미하엘은 몹시 아프다. 전차에서 내려 부근의 허름한 아파트 입구에 앉아 가라앉혀 보려고 애쓰지만 신열로 인한 토악질을 멈출 수 없다. 그때 한나 슈미츠(배우 케이트 윈슬렛)가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돌아와 그를 도와 준다. 성홍열 진단을 받은 미하엘은 석 달간 집에서 쉬게 된다. 회복 후 그는 꽃을 들고 감사 인사를 하러 한나의 아파트를 방문한다. 몸은 다 컸지만 청소년기의 호기심 가득한 미하엘은 한나에게 자석처럼 이끌린다. 그리고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전차 차장인 36살의 한나가 그를 유혹한 것이다. 이후 미하엘의 머릿속은 온통 한나뿐이다. 학교가 파하면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한나의 아파트로 득달같이 달려간다. 어느날부터 한나의 요구대로 미하엘은 책을 읽어 주고 섹스를 즐긴다. <오딧세이>가 첫 낭독 작품이다. 온통 한나와의 섹스 생각뿐인 미하엘은 <채털레이 부인의 사랑>을 다음 작품으로 골랐다가 한나에게 핀잔을 듣기도 한다.

가족과 친구도 모르는 은밀한 사랑 놀음이다. 미하엘은 자신의 연애담을 공개하지 못한다. 용납받지 못할 테니까... 놀림감이 될지도 모르니까... 비정상적이라 여겨져도 멈출 수 없이 달콤했고 나름 진지했던 연애는 몇달 뒤 막을 내리고 만다. 한나가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8년 세월이 흘러 1966년, 하이델베르크 법대에 다니는 미하엘이 어느 교수의 독특한 교수법에 따라 나치 전범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의 경비원 출신 여성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1944년 수용소 소개령으로 죽음의 행진을 하던 도중, 교회 안에 300명의 유대 여성들을 가두어 불에 타죽게 한 혐의다. 화재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 모녀가 그 증인이다. 미하엘은 피고들 중에서 한나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생존자 일라나 마터가 한나는 밤마다 수감자에게 책을 읽어 달라고 요구했다는 증언을 하자 미하엘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아무렇지 않게 개스실로 보낼 열 명의 유대인을 선발했다는 증언에 미하엘은 혼란스러워진다.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교회에 가두어 둔 유대인들을 대피시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한나는 그것이 자신의 일이었다고 답한다. 다른 피고들은 불리한 자백을 피하고 한나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그런 와중에 한나의 가감없는 대답이 법정에 앉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수용소 경비원이 된 것은 다른 직장보다 월급이 두 배 많아서였고, 자신의 임무는 죄수의 무단 이탈을 막는 것이므로 교회의 문을 열어 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피고들이며 법조인들이 그런 한나를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재판 과정을 참관하던 또 다른 법대생은 분노를 터뜨리고 만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블루 칼라 여성들이 상부의 지시에 순종했다는 이유로 유대인 학살의 죄를 모두 뒤집어 써야 하는 재판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외친다. 나치 정권을 찬성했던 어른들 모두가 죽어야 마땅하다면서 강의실을 뛰쳐나간다.

그런데 막상 주인공 미하엘은 그저 괴로워할 뿐이다. 한나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도 확실하게 알아 버렸지만, 과거의 비밀스런 연인인데다 전범이 되어 버린 그녀를 도와줄 용기가 그에게는 없다. 그때 교수가 말한다. "어떻게 느끼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해.“ 하지만 미하엘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과거지사를 밝혀야 한다는 게 수치스럽기도 했겠지만,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고만 주장하는 한나가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도 한몫 하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그녀가 사건의 책임자인지를 확인하는 필적 감정을 위해 이름을 쓸 것을 판사가 요구하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이 학살의 책임자였다고 말한다. 까막눈인 게 알려지느니 죄를 모두 뒤집어 쓰는 편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그 대가는 엄청나다. 한나 혼자만 무기 징역을 선고받는다.

속절없이 세월이 흐른다. 미하엘은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고 딸도 낳고 그 딸은 훌쩍 큰다. 아버지는 늘 홀로이고 싶어한다고 느끼는 딸과의 관계는 서먹하다. 영화 전반에 걸쳐 미하엘은 사회의 일반적인 요구나 통념에 올인하지도 못하고 반대로 자유롭지도 못해 늘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아무튼 과거의 사랑에 대한 연민 때문일까? 아니면 수치심이나 두려움 때문에 재판에 도움 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일까? 미하엘은 책을 한 권 한 권 읽으면서 카세트에 녹음해 재생기와 함께 감옥으로 보낸다. 한나는 과거 ‘꼬맹이’가 보낸 선물임을 알아채고 행복해 한다. 카세트가 수북이 쌓일 즈음, 용기를 낸 한나가 도서실에서 책 한 권을 빌리고, 미하엘의 낭송과 책의 단어들을 일일이 대조해 가며 읽기와 쓰기를 홀로 깨우친다. 마침내 미하엘에게 서툰 편지를 띄우는데 미하엘은 답장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15살 소년이 아니라 닳아진 중년이다. 까막눈이라는 사실을 함구한 채, 글과 관계 없는 일들을 얻어 원초적으로 일하고, 원초적으로 사랑한 한나가 오히려 정직하고 순수해 보인다. 그녀는 전범이고 직접적으로 그런 일에 가담하지 않은 이들은 무죄인 게 모순으로 보인다. 나치 하에서 침묵하고 있었던 중산층, 지식인들이 더 나빠 보인다.

1988년, 교도관이 미하엘에게 전화를 건다. 노인이 된 한나가 출소하게 되었는데, 갈 곳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소포를 보내온 미하엘밖에 연락할 곳이 없었다면서 도움을 청한다. 집과 직장을 마련한 미하엘이 석방 일주일 전 한나를 방문한다. 반가움... 출소 이후의 계획... 이런 이야기만 나누면 좋았을 텐데 미하엘이 기어이 질문 하나를 던진다. 그때의 일들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연애하던 때? 아니요. 아우슈비츠 시절... 한나는 침묵한다.

일주일 후 그녀는 자살로 대답한다. 미하엘이 약속한 도움을 죽음으로 거절한다. 그녀가 감추고 싶어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말 없이 덮어줄 수 있을 것 같았던 마지막 사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는다. 낡은 장식통 속에 모아둔 돈을 유대인 생존자인 일라나에게 주라는 유언을 남긴 채...

다시 얼마의 세월이 흐르고, 미하엘은 업무차 미국에 가면서 유대인 생존 여성을 찾아간다. 한나의 자살 소식을 알리고 돈을 받아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그녀는 홀로코스트와 관계된 그 무엇도 받지 않겠다고 거절한다. 미하엘이 다시 묻는다. 문맹 퇴치 운동에 써도 되겠느냐고... 문맹은 홀로코스트와는 무관할 것 같다면서 유대인 사회에서 문맹 퇴치 기관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 답한다. 일라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잃어버린 장식통을 생각나게 해준 한나의 낡은 장식통만 받는다.

영화의 마지막, 미하엘은 딸을 데리고 한나의 무덤을 찾아간다. 그리고 지난 이야기를 들려 주기 시작한다.

미하엘은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부모 세대의 어두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전후 세대이고, 한나는 국가적, 시대적 비극을 통과한 세대이다. 먹고 살기에 바빴고 사랑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한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독일 민초들의 대명사였을지도 모른다. 전후의 젊은 지식인으로서 미하엘은 한나를 용서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한 것 같다. 미하엘이 들려 줄 한나의 이야기, 독일 역사의 아픈 부분을 미하엘보다 훨씬 젊은 세대인 딸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 답은 영화 속에 없다. 다만 미하엘이 용기를 내어 부끄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슴 밖으로 꺼내고 있다. 그것도 한나가 죽고 나서야...

한나역의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가 좋았다. 특히 표정 연기가 내 마음을 멍들게 하고 울려 놓고 통증을 느끼게 했다. 그러면 그렇지. 케이트 윈슬렛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유대인 학살이라는 무거운 이슈의 잣대를 영화에 들이대는 시선들에 대해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은 "사랑 이야기"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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