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더니즘에서 상대주의란 보통, 절대적으로 올바른 진리란 있을 수 없고 올바른 것은 그것을 정하는 기준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라는 주장, 인식, 가치 등을 말합니다. 이 정의는 사전적 설명이지만 어딘지 경직되어 있고 다소 어렵게 표현되어 있어, 이런 정의만으로는 상대주의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한 가지 생각과 개념을 이해하려면, 문자적이고 사전적인, 1차적 연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더구나 이 생각과 사상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적용하고자 한다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자크 데리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그 사람만큼 알고 있어야 한다.” 맞는 말입니다.

상대주의에 대한 위의 정의는 현대에 이해되고 있는, 상대주의에 대한 많은 이론 가운데 극히 소수의 입장만을 대변한 정의입니다. 현대적 상대주의에 대한 또 다른 입장 중 하나는, 내가 아닌 타인의 가능성과 가치를 인정하며 이해하려는 주장, 인식, 생각입니다. 타자, 즉 다른 이들을 인정한다는 의미로서 그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상대주의를 이해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현대 학계에서 각광 받고 있는 문화 인류학에서 이야기하는 상대주의의 개념이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상대주의의 정의가 이 분야의 의견에 국한될 수 없고 국한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입장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대주의에 대한 편견에서 우리를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데 분명 도움이 됩니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흑인운동과 여성운동을 통한 소수인들의 인권 회복, 버려진 땅의 굶주린 생명에 대한 관심, 그리고 우리 생활 가까이 있는 쓰레기의 재활용 등이 상대주의적 사고의 결과물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대주의에 대해 배타적이기만 하려는 사람들은 자꾸 자기들만의 틀, 울타리를 만드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 틀 안에서만 거주하려고 하며 그 틀 속의 것으로 다른 틀과의 관계를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틀을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안타깝게도 교회 생활과 신앙 속에서도 상대주의에 대한 잘못된 적용의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배타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배타성은 우리들의 신(神)관에도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자꾸 자신들의 틀 속에 가두려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내에서, 인간들의 특정한 문화나 전통이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정의하려고 할 때,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일 뿐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만든 송아지 우상은 애굽의 특정 신을 형상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구해 준 위대한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그리고 시각적으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여호와로 섬기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을 크게 격노케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이 이방신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형상화한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형편과 제도나 관습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성향을 일정한 틀에 가두어 버린 죄였던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면서, 삶의 적용과 행동 속에서는 자기 틀 안에 가둔 죄였습니다.

정말 무한하신 분이라면 한낱 문자나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정의될 수 없는 분일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나 신앙이 무한하신 그분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만을, 그것도 스쳐가듯 알고 있는 것뿐인데, 우리가 가진 것과 아는 것이 절대적인 양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타인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성 어거스틴이 이야기한 인간의 원죄인 'Pride'가 바로 이런 것 아닐까요? 우리 삶의 영적, 정신적, 육적 경험, 사고와 행동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는 그분을 인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 들어 갈 수 있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분의 모습은 영원한 모습의 너무나도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상대주의적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틀을 깨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상대주의도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이라면 무한의 존재(존재라는 말도 실은 하나님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존재는 일정 범위와 테두리가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인 하나님 안에서 단지 배척 당할 내용만은 아닐 것입니다. 편협하고 틀에 가두는 듯한 정의보다, 가능하다면 좀더 포괄적이고 열린 이해가 필요합니다.

문화에 대한 이해는 고정된 잣대와 틀, 그리고 배타적인 생각으로는 곤란합니다. 우리가 가진 문화관이 우리가 가진 신에 대한 관점이기도 합니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관점을 통해 문화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고정되고 틀에 얽매어 있을수록 우리의 문화관 또한 폐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배척해야 할 말이 아니라 우리 안에 품어야 할 개념이 상대주의,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이 아닌가 싶습니다.

작은 사고의 전환을 통해 우리가 보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더 큰 하나님의 가능성과 온 우주의 복잡하고 정교한 섭리를 미세하나마, 확장시켜 경험하는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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