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지상주의!
이 말은 아무래도 당분간 세상 속에서 활개칠 것 같습니다. 아름다워지기 위한 노력은 남녀노소와 시공을 초월한 인류의 가장 큰 욕망 중 하나인가 봅니다. 

중국의 역사서는 가야인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아기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했다. 지금도 진한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납작하다.’ 기록 속의 진한에는 김해 지역의 가야인도 포함됩니다. 머리를 납작하게 한다고 해서 그 당시에는 이를 편두라고 했습니다. 역사 속에서만 존재했던 편두의 실체는 우리나라 옛 가야 지역 뿐만 아니라 이집트에서도 고고학 발굴을 통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성형 수술은 6, 7세기경 고대 인도의 힌두교에서 간통죄를 지은 처벌로 잘라 버린 코를 쿠마스라는 의사가 재건수술을 한 것이 그 시초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코는 권위의 상징이었으며 코를 자르는 것은 범죄자를 벌하거나 정복한 도시에서 이뤄지던 최대의 형벌이었습니다.
이런 인도의 의술은 동쪽으로 내려와 중국에까지 미쳤고 중국 고서에는 언청이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케이스가 기록에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근대의 기록에 나와 있는 최초의 성형수술을 받은 사람은 16세기의 한 용감한 유럽 남성이었습니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지나치리만큼 용감했던 이 사람은 친구와의 결투 도중 코가 잘렸습니다. 그래서 절박한 심정으로 코를 재건하는 성형수술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쉽게도 팔의 피부를 이식해 코를 새로 달게 된 이 사나이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사람에게 새로운 코를 안겨 준 덕분에 큰 수난을 겪었던 이탈리아인 의사 타글리아코치의 이름은 남아 있습니다.  이 의사는 훌륭한 수술 솜씨가 오히려 화근이 되어 파문을 당하고 맙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감히 코를 만들어 주었다는, 너무도 시대를 앞서간 행동이 교황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피조물을 인간이 교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대역죄로 인식되었습니다.

아름다워지려고 하는 노력과 욕망의 표출을 매도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단점을 극복해 자신감 있는 정체성을 가질 수만 있다면 고려해 봄직도 합니다.
문제는 아름다움의 대상이 천편일률적으로 서구지향적이라는 겁니다. 물론 아름다움에도 시대적 조류와 스타일이 있음을 부인하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지향할 만한 아름다움의 척도가 우리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백인의 그것이라는 것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솟아 오른 콧날, 움푹 들어간 눈두덩, 갸름한 얼굴 턱선 등 모든 것이 우리 것이라기보다는 백인들의 형상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척도에도 정치적 힘이 개입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신종 문화 사대주의가 아닐까요?
날씬함보다 비대함이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습니다. 숯검댕이 눈썹보다 눈썹을 미는 것이 아름다움의 상징일 때도 있었습니다. 짱구머리보다 편두가 대접받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의 가치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시공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면, 이왕이면 우리 민족, 우리 인종의 특징이 시대적 스타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동서양 모든 사람들이 쭉 찢어진 우리 눈처럼 성형하고, 한복의 아름다움을 자기들의 패턴 속에 응용하고 기와집, 구들장 문화가 최고의 패션인 시절이 오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각자의 문화와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자랑스러워 하며 서로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서로 다른 모습 속에서 내게는 없는 타인의 아름다움을 칭찬해 줄 수 있는 그런 시절이 오면 더 좋겠습니다.

그곳이 아마 우리 교회에서 말하는 천국과 가장 가까운 모습일 것입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