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바다 위에 하나, 둘, 셋, 봉긋이 올라온 돌섬을 멀리서 찍은 사진 형상이다. 돌섬 주위를 따라서 상처가 나아가는 흔적으로 허옇게 두어 겹 벗겨진 허물은 철썩이는 파도를 그려놓은 듯하다. 나는 지금 무릎에 생긴 상처가 아물어가는 흔적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다.

열흘 전에 우리 부부는 어두워지는 동네 골목에서 자전거를 타고 운동을 하고 있었다. 동네 골목을 예닐곱 바퀴 돌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그 저녁 마지막 바퀴를 다 돌고선 집 앞에 당도할 즈음이었다. 앞집 차고 문이 열려 있었고, 휴가에서 돌아온 앞집 남자가 우리를 보고 반가워 드라이브웨이까지 뛰어나왔다. 우리도 무척 반가웠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자전거 위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곤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마주 인사를 했다. 자전거는 달리던 속도로 인해 앞으로 갔고 그 집 앞을 지나친 우린 몸을 돌려 무사히 휴가에서 돌아온 이웃을 반겼다.

순간! 내 몸이 휘청하더니 무릎을 콘크리트에 부딪치고 말았다. 넘어짐을 인식한 나는 함께 넘어진 남편도 아랑곳하지 않고 따끔하게 느껴지는 무릎, 관절을 다치지는 않았나 겁이 나서 점검을 했다. 평소 남편은 누군가에게서 장가 잘 갔다는 말을 들을 때면 아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가를 설명하곤 억울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 남편이 아내 칭찬하는 소리가 쑥스러워 괜한 소리를 하는 거라 여겼다. 같이 떨어진 남편의 안전은 생각하지도 않고 나만을 챙기는 모습을 통하여 남편의 말이 백 번 옳았구나! 반성을 하면서 남편을 챙겼다. 몹시 아파하는 남편은 가슴 근육을 좀 다친 듯했다.

급하게 뛰어온 앞집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우린 일어나 사태를 수습했다. 크게 다치지 않아 안도하며 ‘일주일에 한두 번씩 보는 날 그렇게 반기느냐’는 농담을 남기고 앞집 남자는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그분의 말대로 우리는 그랬다. 오랜 세월, 26년을 이웃인 그 가족과는 한주에 한두 번씩 마주쳤다. 자전거를 탔다는 것까지 잊고 호들갑을 떨며 인사하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앞집 남자는 마주칠 때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는 본받을 점이 참 많은 멋진 사람이다. 그의 문간방에서 2년 혹은 3년씩 지내다가 사회로 나간 청소년들을 기억한다. 개인 사정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학생들을 데려다가 의무교육인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게 보호자가 되어 사회로 내보내는 일을 해왔다. 모두 좋은 사회인이 되어 명절 때 인사 오는 것을 자주 본다. 뒤뜰을 아름답게 가꾸어 놓은 이유도 가난한 젊은이들의 결혼식과 피로연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교회의 장로이자 사업가인 그는 자칫 혼자 문화에 길들여지는 어린 세대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자신의 자녀들은 모두 성인이 된 지금에도 지극한 정성으로 다음 세대를 섬기고 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청소년 그룹을 가끔 불러 집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동네 공원에 풀어놓고 마음껏 뛰어놀고 먹게 한다. 그래서 거의 모든 주말에 우리 골목은 차들로 꽉 찬다. 빼곡하게 들어선 차들을 보면서 그의 섬기는 자세를 확인하는 듯해 흐뭇하기만 하다.

사실 난 같이 사고를 당한 내 남편의 안전조차도 안중에 없고 나만을 위하는 이기주의자이기에 사람들을 섬기고 도움이 필요한 자를 진심으로 섬기는 그 모습이 존경스럽기만 하나보다.

살다 보면 이웃의 도움이 필요한 때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렇게 좋은 이웃을 둔 덕을 우리는 톡톡히 보며 살아가고 있다. 외출시 차고 문을 닫았는지 그냥 왔는지 아리송할 때는 그런 이웃 때문에 걱정이 필요 없다. 열려진 차고 문을 자동 잠금으로 닫고 나오는 예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우편물이 잘못 배달되어 그 집으로 가면 돌려 주는 것은 물론이요, 쓰레기 버리는 날 쓰레기통 챙겨 주는 소소한 일은 그가 먼저 시작하여 우리도 배워 버렸다. 실내 장식에 소질이 있는 그 부인은 누군가가 도움을 부탁하면 기쁘게 달려간다.

어느 해 겨울, 우리 집 보일러가 고장이 난 것을 알고 일부러 찾아와 자기집 화장실을 쓰게 해주는 등 그는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사는 이웃인 것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골목의 사람들은 터줏대감 같은 그의 영향을 받고 있다. 새로 이사 오는 사람들도 처음엔 좀 서먹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스스럼없이 다가와 인사하고 이야기하며 개의 안부는 물론 멀리 떠나 있는 아이들의 안부를 묻고, 건강이나 사업들로 걱정거리가 생기면 서로 기도해 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걷다가 누군가가 차고에서 목공일을 하고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서로 도울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 간다. 한두 사람이 어찌 큰 일을 할 수 있을까마는 한 골목의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난 생생히 보고 말았다.

가로등 밑에선 그저 따끔하다고만 느낀 무릎이 집에 들어와서 보니 양말까지 적실 정도로 철철 흐르는 피 밑으로 큰 생채기가 생겼다. 며칠 동안 진물이 흐르며 쓰라리고, 아프기를 반복하다가 사나흘 전 부턴 아픈 정도가 엷어지더니 제법 아물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젠 상처 입었던 자리가 줄어들고 딱지가 앉았다. 소독을 자주 한 탓인지 딱지의 색이 노란기가 섞인 진회색, 영락없는 바위 빛깔이다. 깊고 넓게 파인 곳은 얼기설기 눌러앉은 모양이 높이까지 느껴지는 바위 모양이요. 그 옆으로 몇 밀리미터 떨어진 곳은 그보다는 작은 상처였던지 작은 바위섬으로 눌러 있고 바로 그 옆으로 더 자잘한 돌멩이가 앉은 모습이다. 그리하여 돌섬 삼형제가 형성된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지저분하고 흉하지만 찬찬히 들여다 보니 누군가의 손으로 빚어진 예술이다. 좋은 이웃을 상기시켜 주어 그렇게 보였으리라. 26년 서로 앞집으로 지내면서 껄끄럽고 보기 싫은 관계였다면 어쩔 뻔했나 생각하니 아찔하다. 좋은 관계뿐 아니라 닮아가고 싶은 이웃을 가졌으니 이만한 상처가 불편한들 대수랴. 더 진실이 들어 있는 반가운 몸짓으로 그를 맞는다 해도 우린 분명 복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생채기가 완전히 치유되어 흔적이 없어질 지라도 망망한 바다 위에 자태를 드러내어 물새들의 쉼터가 되는 돌섬처럼, 어려운 세상 속에 쉴 수 있는 작은 공간으로 오래도록 이웃과 함께 좋은 골목을 만들어 가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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