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 시간이 좀 생겨서 각종 서류 묶음을 넣어 둔 캐비닛과 옷장 서랍 등이 있는 안방을 정리하기로 했다. 무얼 그리도 열심히 끌어 모았던지 몇 평 안 되는 방안이 온갖 잡동사니로 넘쳐났다. 그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정리정돈을 미루어 왔지만, 이제는 이 잡동사니들이 침대 주변까지 침범해 오기에 부득이 내린 결단이다.

유틸리티 영수증들 묶음과 스크랩해 둔 낡은 일간지 조각들, 오래된 립스틱과 로션, 헌옷가지들이 장롱과 화장대, 안방 여기저기에서 픽업되어 쓰레기 봉지로 직행했다. 스크랩해 둔 일간지 조각들은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대충 훑어 보느라 잠시 손놀림이 지연되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가속이 붙었다.

일종의 카타르시스였다. 이렇게 신나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나는 마치 버리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두 눈에 불을 켜고 버렸다. 나중에는 체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버렸다. 무조건 버리고 또 버렸다. 오래된 활자들에 또 발목을 잡힐까 봐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일간지 다발은 눈을 찍 감고 버렸다.

 
한참을 그러고 나니 크고 시커먼 쓰레기 뭉치가 서너 개 좋이 만들어졌다. 뻥튀기처럼 한껏 부푼 놈, 박스처럼 모난 놈, 길쭉하니 못 생긴 놈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집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쓰레기 트럭이 오는 날은 한 이틀 후나 되므로 놈들을 뒤뜰에다 던져 놓았다.

안방을 다시 둘러보니 딴 세상 같았다. 내가 아끼던 몇 개의 CD와 책들도 한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좋은데 진작 치워 버릴 걸. 그 동안 이것저것 할 것 없이 잔뜩 움켜 쥐고 살았던 스스로를 자책하며 블라인드를 활짝 열어 젖혔다. 블라인드 너머의 풍경조차 말쑥하게 다가왔다.

창밖을 보며 용케 숙청 대상에서 제외된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를 감상하고 있자니 그야말로 원더풀 월드였다. 버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즈음에도 이 테이프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짧은 시간 향유한 원더풀 라이프에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남편 때문이었다. 뭐든지 일단 붙들고 보는 남편의 존재를 깜박했던 것이다. 밖에서 돌아온 남편은 말쑥하게 정리된 방안 풍경에는 별 관심이 없고, 데스크 주변과 서류철부터 살폈다. 중요한 서류나 영수증들을 함부로 버리는 내 버릇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우스 페이먼트 북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해서, 뒤뜰에 내동댕이쳐진 쓰레기 봉지들이 다시 집안으로 불려 들어오고, 다이닝룸에서 수색이 시작되었다(밖이 좀 쌀쌀했으므로). 그 과정에서 다이닝룸 바닥이 셰이브 로션과 벤게이(Ben.Gay)의 하얀 페이스트로 뒤범벅이 되었다. 쓰레기를 뒤뜰로 내던질 때 벤게이와 로션의 유리 컨테이너들이 박살이 난 모양이다. 바르는 진통제의 독특한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고 손과 발은 크림 로션으로 끈적거렸다.

나는 식식거리면서 쓰레기 점검을 계속했고, 결국 실종된 그놈의 페이먼트 북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죄 없이 내몰린 길쭉한 직사각형의 종이뭉치는 크림 로션을 흠뻑 뒤집어 쓴 채 오래된 영수증 사이에 끼어 있었다.

냄새 제거를 위해 문이란 문은 다 열어 제치고, 환풍기를 틀고, 다이닝룸 바닥을 훔쳐내는데 신세타령이 절로 나왔다. 까짓 페이먼트 북 분실신고하고 다시 주문하면 될 것을 생사람 잡는다고 눈물까지 찔끔거리고 나서 얻은 교훈 하나는 버리되 잘 버려야 된다는 것. 그래서 한동안 버리기의 카타르시스는 자제해야 될 모양이다.

그랬는데 웬걸, 다이닝룸을 대충 치우고 말쑥하게 정리된 안방으로 다시 들어가 보니 역시 원더풀 월드다. 음악의 볼륨을 높이니 다운됐던 기분도 한결 가신다. 버림으로써 얻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다. 그러기에 인체를 비롯한 삼라만상이, 크고 작은 컴퓨터가 인풋과 아웃풋의 순환을 반복하는 게 아니겠는가. 이참에 지난 계절이 남기고 간 미련의 부스러기, 못 다 이룬 꿈의 파편들도 모조리 떨쳐 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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