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도 기다림에 설레이는 듯,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낯선 길을 환하게 열어 주는 11월의 늦가을 저녁, 시카고의 어느 호텔 로비. 언니와 나는 사진 속에서만 보았던 쥬디라는 작은 체구의 미국 할머니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미국 할머니인 쥬디와 한국 사람인 언니는 그렇게 54년만에 처음으로 만나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안아보고 얼굴을 만져보고 두 손을 잡아보더니 또 안아보고 눈물을 글썽이며 정말 보고 싶었다며 수없이 말하는 쥬디 할머니...

지금으로부터 54년 전, 쥬디는 우연히 잡지책을 읽다가 전쟁으로 페허가 된 가난하고 굶주린 아주 작은 나라인 코리아를 알게 되었다. 그 후 쥬디는 ‘Compassion'이라는 선교단체에 전화해서 고아들의 사진과 명단을 받게 되었고, 아동 결연 선교라는 하나님이 맺어 주신 인연으로 언니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지구의 한 귀퉁이 작은 나라, 그곳에서도 가장 남쪽 끝인 목포의 ‘가나안 모자원’에서 도움을 받고 자란 갓난아이가 이제는 55살, 한 가정의 엄마가 되었고, 아기 때부터 엄마라고 부르라며 후원해 준 쥬디를 이제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쥬디는 간호사 공부를 하고 있던 열아홉 살 아가씨였다. 매달 후원금과 옷들을 보내 주었고, 생일과 크리스마스때는 엄마처럼 정성스럽게 챙겨 주는 따뜻하고 사랑 많은 후원자였다. 고등학교까지 그곳에서 도움을 받다가 나오게 되었는데, 쥬디는 언니에게 간호사 공부를 권유해 주었고, 계속 언니와 연락되기를 원했다. 영어로 편지를 읽고 써야 하는 문제도 있었고, 자주 이사를 가는 바람에 몇 달씩 연락이 없을 때도 있었는데, 쥬디는 목포시 경찰서와 적십자사를 통해서 언니를 찾아내곤 했다.

쥬디는 간호사가 되어 의사인 남편을 만났지만,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자 언니를 입양할 계획을 하게 되었다. 쥬디의 소원대로 언니는 간호사가 되어 일하던 중, 형부를 만나 입양을 포기하고 그만 한국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언니는 아이를 낳고 자주 이사하느라 쥬디와 연락이 끊긴 채 어언 25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버렸다.

 
먼 기억 속에 잊혀진 줄만 알았는데, 이곳에 오래 전에 정착해 살고 있는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미국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언니의 양엄마 같은 후원자 쥬디 생각이 났다. 지금이라도 쥬디를 찾아보고 은혜와 감사를 전하자고 한국에 있는 언니와 통화했지만, 언니는 주소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고 쥬디라는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언니가 며칠 동안 고민하던 끝에, 집 번지와 길 이름, 도시 이름을 희미하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인터넷으로 길, 도시 이름의 스펠링과 Zip code를 알 수는 있었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내용들이 맞는 건지, 그보다 쥬디가 아직 생존해 있는지, 똑같은 장소에 몇십 년 동안 살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하나님께 맡긴 채 나는 편지를 띄웠다. 내 연락처를 남겼고, 쥬디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꼭 소식을 전해 달라는 부탁도 덧붙였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낯선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나를 찾고 있었다. 본인이 쥬디라면서 언니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확인한 쥬디는 언니가 아직 살아 있느냐고 물었고, 54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언니를 가슴에 품고 기도했노라고 말했다. 온몸과 마음으로 감동한 나는 눈물을 흘렸고, 쥬디 또한 믿을 수 없는 기적이라며 찾아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쥬디는 편지를 받기 6개월 전부터 언니가 보고 싶고 생각나서 하나님께 언니의 소식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늘도 감동한 쥬디와 언니의 아름다운 만남. 쥬디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은,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임을 깨닫게 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다리가 되어 나는 거의 2년을 편지로 왕래하게 되었다. 쥬디는 언니의 입양을 포기하고 기도하며 입양할 아이를 찾던 중, 발달 장애인 수잔을 사랑과 정성으로 키웠으며 올해 10월에 결혼도 하게 되었다. 수잔의 결혼식에도 참석할 겸, 죽기 전에 쥬디를 만나고 싶다면서 언니는 내가 사는 시카고에 드디어 왔다. 한국을 떠난 후, 언니와 나의 만남도 꼭 20년만에 이루어졌다. 요즘 세상에 흔한 이야기가 아닌 ‘특별한 만남’을 나는 이번 가을에 두 번이나 가지는 축복을 누린 셈이다.

언니는 한국에서 한 달 휴가를 받아 10월에 이곳에 왔고, 쥬디는 입양한 딸의 결혼식을 치른 후 11월에 시카고에 와서 54년만에 언니를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펜실베니아 시골에 살고 있는 쥬디는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시카고라는 낯선 곳에 거의 하루를 걸려 힘들게 도착했다. 내가 출석한 교회에서 ‘쥬디와 언니의 감동 스토리’를 듣고는 선교 위원회와 함께 쥬디를 환영해 주려고 했지만,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쥬디의 마음을 헤아려 우린 호텔에서 첫 만남을 해야만 했다. 믿기지 않는 듯, 두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손을 꼭 잡고 다녔고, 말은 안 통해도 수십 년 동안 기도하며 사랑을 나눈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전혀 낯설거나 어색해 하지 않았다. 여느 엄마와 딸들처럼 우린 양쪽에 팔짱을 끼고 보태닉 가든과 시카고 다운타운을 걸어 다녔고, 오래된 인연답게 함께 큰 소리로 웃고 그동안 못 다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면서 행복해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을 테마로 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우리의 남은 생을 위해 또 다른 추억을 남기는 사진들을 열심히 찍기도 했다. 하루는 우리 교회를 방문해서 목사님과 장로님들의 환영을 받고 선교 보고를 듣기도 했고, 쥬디와 언니의 감동 스토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아동 결연 선교’에 큰 도전과 용기를 주는 아름다운 모델이 되기를 모두들 소원했다. 3박 4일의 아름답고 특별한 만남을 아쉬워하며, 쥬디와 언니는 서로 안고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기약 없는 작별인사를 해야만 했다. 아직도 쥬디는 언니를 딸이라 부르고, 언니는 엄마라 부른다.

쥬디와 언니는 우리나라 6.25전쟁 후, 가난하고 굶주렸던 이름 없는 작은 나라인 한국과 미국 사이에 ‘아동 결연 선교’의 역사적 산 증인이 되었다. 단지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준 감동 스토리가 되었고, 우리들에게 믿음과 선교에 대한 ‘도전과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들렸다. 한 영혼을 끝까지 사랑하는 쥬디의 ‘아름다운 믿음’에 한국을 대표해서 언니와 나는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전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쥬디와 언니의 감동 스토리’는 분명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선교의 마인드를 심어 준 아름다운 모델이 된 것 같다. 쥬디가 심어준 그 사랑의 마음을 이어받아, 언니와 나는 우리처럼 가난했던 또 다른 나라의 아이들을 품고 아동 결연 선교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이 복음의 씨를 뿌려 54년간 기도와 사랑으로 키우니까, 열매를 맺고 다시 뿌리를 내려 퍼져나가는 하나님의 나라. 그 사랑이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계속 이어지길 소원해 본다. 전쟁고아들을 위해 사랑으로 후원한 쥬디는, 장애가 있는 아이를 입양하여 사랑과 정성으로 키웠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일학교에서 청소년들을 가르쳤던 아주 신실한 크리스천이다. 이 땅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길을 가는 수많은 사람들. 우린 그들의 도움으로 오늘 여기에 있고 ‘후원받은 후원자’가 되어 다시 그 길을 가고 있다. 이 아름답고 특별한 만남을 허락해 주신 하늘 아버지께 감사하며,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내가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그 아이를 위해 나도 쥬디처럼 끝까지 기도하며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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