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에서 빼놓아서는 안 되는 신학 사상은 바로 ‘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33의 산상수훈을 통해서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의’라고 하셨는데, 이 ‘의’사상은 바울 신학의 핵심 용어이기도 합니다.

의는 사전적으로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의’라는 개념은 혼자선 이룰 수 없고, 관계 안에서만 이룰 수 있는 개념입니다.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관계든 관계 안에 들어가면 상대에 대한 의무, 책임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모자식간이라면 부모에겐 부모로서의 의무가 발생하고, 자녀에겐 자녀로서의 의무가 발생한다는 말입니다. ‘의’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무를 잘 감당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냥 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마다 요구하는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에 맞춰서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개인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의무와 책임을 감당해 냈을 때 의가 주어지는 것이며 의인이라 칭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매우 힘든 일입니다.

에베소서 4장 16절은 이런 ‘의’의 정의와 ‘의’가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 공동체에 속한 모든 지체들이 연합하고 격려하며 세워 주어, 건강한 몸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의’를 설명해 줍니다.

온몸에 기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몸이 건강하려면 각 지체가 서로 돕고 연합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동체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 삼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태도와 영성을 본받아 그 명령대로 서로를 돌볼 때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서로 도움을 받고 연결된다고 했습니다. 각 기관의 모양도 다르고, 역할도 다르며, 하는 일도 다릅니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었을 때 몸은 건강한 것입니다. 연합하고 서로 돕는 소통의 관계를 위해서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심리 상태를 점검하는 방법 가운데, 측정 대상자가 일정한 시간의 연설이나 대화 또는 일정한 길이의 문장에서 ‘나’라는 단어를 얼마나 자주 쓰는가를 조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물론 ‘나’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심리상태는 건전하지 못하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1940년, 미국의 한 언어학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히틀러는 ‘나’라는 단어를 53단어에 한 번씩 썼고 뭇솔리니는 83단어에 한 번씩 썼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그에 대한 기사 6줄 중에서 ‘나’라는 말을 6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나’를 드러내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내가 두드러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을 돌아보면 관계 속에서 ‘의’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히틀러나 뭇솔리니, 혹은 고집 센 이기주의자들처럼 나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자기중심적인 내용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당신 자신을 빛이요 길이라고 설명하신 것도, 높은 신적인 지위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희생하며 섬기겠다는 고백이며, 희생과 사랑으로 사는 모습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당신 자신을 비우고 이웃을 위해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그들을 어떻게 이해하며, 그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가 예수님의 관심사였습니다. 항상 ‘우리’라는 개념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나’ 대신 ‘우리’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와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을 통해 사랑하시고 희생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보여 주신 ‘의’를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가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감당할 책임으로서의 ‘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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