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중 가장 깊은 밤이다. 지나가는 바람도 잠시 숨을 돌리는 그 시간. 이조식당의 한 공간에서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였다. 바쁜 이민의 삶 속에서 적지 않은 수효였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왜 지나가는 바람조차 숨을 죽이는 야심한 시각에 그곳에 모여 황금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가.
문학 동우회다. 이름하여 ‘열린 문학회’.

먹고 사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일까. 힘든 이민생활의 자투리 시간을 쪼개어 매달 마지막 주일 저녁 그곳에서 모임을 가진 지 벌써 수개월째였다. 성별과 신분과 연령에 관계없이 문학을 사랑하고, 그야말로 문학에 목을 매는 사람이면 누구나 대환영이었던... 벌써 오래 전 일이다.
문학에의 열정과 투지로 의기투합한 사람들이었다. 문우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처럼 비장했다. 비록 문은 열어 두었지만, 문학이란 아무나 쉽게 근접할 수 없는 그 무엇이기에 때로 인고의 발효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잔잔히 흐르는 경음악에 엇박자를 맞추며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그 긴장감을 전 MBC 아나운서인 문무일 선생이 순식간에 해소시켜 주었다. 순서를 진행하는 그의 화사한 언변에 문우들의 굳은 표정들이 봄 눈 녹듯 사라졌다. 과연 문학과 언변의 함수관계가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신통하게도 문 선생은 말만 잘하는 게 아니라 글도 잘 쓰니 말이다.
각설하고... 문학 마니아들이 거기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고?

여러 가지 많이 한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에 홍하의 골짜기나 솔베이지 송들을 감상하고, 이어서 푸짐한 저녁을 먹는다. 김이 솔솔 나는 된장찌개, 만둣국, 회덮밥, 노리끼리하게 프라이한 영광굴비 등등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며 문우들을 유혹한다.

식사가 끝나면 초청강사의 문학 강의를 듣고, 또 각자 준비해 온 시낭송을 한다. 맨 나중에는 가라오케 순서도 있다. 문우들의 음악적 취향도 다양해서, 존 덴버와 박인희, 칠갑산과 해 저문 소양강 처녀들이 한자리에 서로 어우러져 흥을 돋운다. 흥취가 고조에 달하면 플로어에 나가서 스텝을 밟기도 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날의 하일라이트는 초청강사의 문학 강의였다. ‘언어의 함축성과 양면성’이라는 주제를 놓고 유인국 교수는 열변을 토하는데, 지난 날 한국이나 미국 어디서도 들어 보지 못한 명강의였다. 표기되는 언어는 그냥 ‘사인(sign)’일 뿐이며 그것은 ‘의미(meaning)’라는 양면성으로 보완되어 서로 필연이 아닌 자의적(Arbitrary) 관계를 가지고 상호보완 협력한다고. 언어는 늘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되풀이하지만, 그것을 통제하는 ‘랑그(문법)’라는 언어시스템이 있어서 ‘빠롤’이라는 개인적인 일상의 언어가 자유롭게 활용된다는... 뭐 그리 복잡한지, 이마에 내 천 자를 그리며 불쌍한 회색의 뇌세포를 혹사해 보지만, 문학이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인 이상 우리는 기꺼이 언어의 양면성을 내 비망록에 편입할 수밖에.

그리고 시낭송 순서에서 문우들은 각각 5분간의 연사가 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시간 절약을 위해 한 사람당 최소한 5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그 짧은 시간 안에 각자의 문학관과 철학이 집약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시와 짧은 수필을 위시하여 살아가는 이야기, 신변잡기, 횡설수설, 팔자소관, 신세타령... 뭐든지 허용된다. 그것들 역시 문학의 산물이요 일부라니, 문학이란 과연 광범위하고 오묘하기 짝이 없는 신통방통한 존재일 터였다.

나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집곰인 나를 그곳으로 끌어낸 이규태 원장님을 위시해서 ‘도피성’의 허권 목사님, 하찮은 물방울 하나에도 생명력을 불어넣는 손지언 여사(얼마 전 소천)와 열정적인 수필가 최수희 여사, 삶의 고뇌와 아픔을 시어로 풀어내는 스몰 비즈니스 경영인 미스 리와 시골버스 안에서의 에피소드를 삶의 한 단면으로 산뜻하게 엮어낼 줄 아는 박정애 선생 등등...

이 문학의 대가들과 함께 나도 내게 분배된 5분을 들고 마이크 앞에 서야 했다. 말주변머리라고는 먹고 죽을래도 없는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은 남의 시를 낭송하거나 몇 마디 더듬거리다가 쫓기듯 연단을 내려오는 일이 고작인데,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매번 이곳으로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 그냥 문학이 좋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며 오순도순 모여 앉은 문우들에게서 먼 옛날 깊고도 깊은 이야기 골을 유추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유년의 이야기 골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 모자를 잔뜩 덮어쓴 초가집 한 채가 있었고 따스한 호롱불빛이 창호지 사이로 일렁이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할머니와 어린 손자의 옛날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소년이 할머니의 무릎에 앉아서 화롯불에 톡톡 튀는 알밤을 까먹으면서 밤이 이슥하도록 듣는 이야기들은 삼년 고개 이야기,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 우렁이 각시 이야기 등등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새 새록새록 잠이 든 소년은 꿈나라에서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만나기도 하고...

어린 시절, 우리들 대부분이 경험한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다. 그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유능한 이야기 작가일 터였다. 문학이란 일련의 이야기이며, 그래서 그 이야기에 대한 향수가 다시 우리들로 하여금 문학이라는 매혹적인 나무에 목을 매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날의 해와 달이, 삼년고개와 우렁이 각시가 워싱턴의 한 모퉁이에서 고운 시어의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또 스러져가리라.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해가는 언어처럼, 우리네 삶처럼. 삶이 유한적이기에 그것은 더욱더 치열하고 애잔하고 아름다운 것이리라. 잠깐 나타났다가 스러지는 여름날의 불꽃놀이처럼. 영원할 것 같은 지금 이 순간도 결국은 하나의 옛이야기로 남게 될 것을...

아마도 이 깊고 깊은 겨울밤, 우리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달려왔으리라. 지상에서 가장 깊고, 어둡고, 고요한 프로스트의 눈 덮인 숲을 확인하기 위하여!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But I have promises to k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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