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어머니의 일주기 추도식을 맞아 동생들과 함께 지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인 공원묘지(cemetery)로 향했다.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에 자리한 아담한 크기의 묘지는 상큼한 자태의 이른 봄단장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향후 100년 동안 어머니의 육신은 이 아름다운 동산에서 법적인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지낼 것이다. 가족들이 갖다 놓은 안개꽃이나 국화 다발이 강풍에 날아가도, 홍수가 나서 세상이 물바다가 되어도 이 묘지만은 끄떡없단다. 묘지 관리인은 강풍에 동판 위를 벗어난 조화도 다시 꽃아 놓을 것이고, 패인 구덩이를 메우고, 여름에는 말쑥하게 잔디도 깎을 것이다. 겨울이면 쌓인 눈을 치워 줄 것이고, 동판 아래 잠든 사람들이 외롭지는 않은지, 무탈한지(?) 가끔씩 살펴 보려고 올 것이다. 그러니 이제 어머니는 걱정 없겠다. 몸은 자녀들과 관리인이 돌봐 줄 것이고, 영혼은 보좌 앞 생명강가에서 편히 쉬고 계실 터이니!

우리는 생전에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동판 위에 올려 놓고 미리 준비한 부케 다발을 동판에 부착된 화병에 꽂았다. 틱이라도 달려들지 않을까 주변을 살피면서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불렀다.

저 장미꽃 위의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초봄의 공원은 이제 막 동면에서 깨어난 생명체들의 수런거림으로 분주하면서도 엄숙했다. 환희의 팡파르를 꿈꾸는 만물과 그들을 향한 무언의 약속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차가운 땅 속 깊은 어두움을 더듬어 나아가는 혼돈을 지나 대지의 균열 사이로 갸웃이 고개를 내미는 새싹들, 그 줄기를 달리는 수액의 고통, 애처롭게 피어나려는 봉우리들, 터지려는 봉오리의 고통... 그 리얼하고 상큼한 풍경 사이로 나른한 아지랑이가 먼 지평선 위로 피어오르고 이름 모를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고 있었다.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한애희 집사님의 형부도 이곳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 교회 묘지로 분양받은 이곳에 많은 성도들이 묻혀 마지막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자세히 보니 장로님, 권사님, 목사님들의 직함과 생몰 연도, 그리고 짧은 문구들이 동판 위에 새겨져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 주님 품에 잠들다”
“우리들의 사랑하는 아버지 이곳에 영면하다”
“사랑하는 아내 부활의 날 다시 만나리”

동판에 새겨진 묘비명들이 고인들의 지난 삶을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대부분의 묘비명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 대상들을 수식하고 있었다. 술람미 여인을 향한 솔로몬의 고백처럼,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인가. 묘비까지 동행하는 사랑은 천국의 여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사랑의 힘으로 결속된 그들은 생전처럼 의견이 분산되거나 아옹다옹하는 일 없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그 어떤 비난이나 불평도 있을 리 없었다. 사자들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세로 대지를 보듬고 누워 있었다. 아니 대지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곧 대지와 합류할 것이다. 창세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흙의 순환이다. 거주민 전원이 모두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니 얼마나 순수하고 평화로운 마을인가.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 보면서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그 중 하나가 묘지에 대한 인식이다. 묘지가 주로 산에 위치한 한국에서는 산소에 갈 일이 별로 없었다. 기독교인으로서 성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산을 오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죽은 자와 산자가 한 마을에서 같이 살고(?) 있으니, 묘지는 일상에서 흔하게 접할 수밖에 없는 풍경이 되고 말았다.

운전하면서 지나치는 미국 묘지의 풍경은 늘 음침하고 괴기스러웠다. 미국 호러 영화의 본산지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 남편의 묘지에 와서 흐느끼던 부인이 남편이 살아 있던 때의 일을 반추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점차 불평과 원망의 말들을 쏟아내게 되었는데, 그때 죽은 남편의 손이 무덤에서 쑥 올라와 부인을 땅속으로 끌고 간다는 호러 영상이 떠오르기도 하고, 스티븐 킹의 ‘총알운전기사’ 이야기도 그 공포심을 부추겼다. 그래서인가. 늘 공원묘지를 기피하던 습관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그곳에 누워 계시기 때문일까. 이제 묘지의 풍경이 따스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고향집에 온 것 같은 포근함마저 있다. 묘지에 묻힌 자들도 한때 우리와 똑같은 보통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더 이상 운이 없고 불행한 사람들의 대명사가 아니라 우리도 언제든지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또 다른 삶을 여는 출발점이기도 하다는 것을...

동생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얘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가는 길. 일 년 전 그날처럼 하루의 임무를 완수한 태양이 서산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장렬하게 전사하고 있었다. 핏빛 석양과 극지의 오로라처럼 화사한 노을의 장관. 그 풍경이 그날따라 가슴을 먹먹하게 울렸다. 지치지도 않는가, 저렇게 붉디 붉은 선혈을 매일 매일 쏟아내야 하다니...

그 풍경은 먼 옛날 지구가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던 시절에도 존재했다. 시골 예배당의 삭막한 나무비탈 지평선을 곱게 물들이던 석양, 불타는 모세의 떨기나무,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그곳에서 신을 벗어라!

나뭇잎 하나 태우지 않고, 연기 한 오라기 연기도 피우지 않은, 완벽한 불꽃 속의 명령이었다. 그 불꽃의 전언을 들으러 노을진 탱자나무 울타리를 따라 수요저녁예배를 가시던 어머니(또 어머니가 나왔네!), 석양을 배경으로 나지막이 서있는 목사관을 조심스레 걸어 나오던 젊은 시절의 형부(목사님)...  이 숙연한 저녁 시간. 남편이 모는 승용차의 조수석에 앉아서 나는 그날의 엄숙한 노을빛 교훈을 듣는다. 서산 너머로 사라지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몸을 담고 살아가는 지구임을, 그 엄연한 사실을 일깨우는 세미한 음성(inner voice)에 귀를 기울인다.

그 음성은 또한 삭막한 생활전선 속에서 아옹다옹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곧 다가올 밤을 예고하며, 서로 풀고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타이른다. 먼저 섬기고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반추하게 한다.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일몰의 교훈이 있는 세계, 어머니는 떠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주가 나 함께 동행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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