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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윌리엄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은 1891년 2월 8일 미국 조지아 주 토마스 빌에서 아버지 텔 린튼과 어머니 폰더 앨더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2년 6월, 조지아 공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당시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는 제너럴 일렉트릭(GE) 회사 입사를 마다하고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 교육 선교사로 임명받았다.입국윌리엄 린튼은 1912년 8월 23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항하여 9월 20일 목포항에 도착, 입국했다. 그의 첫 선교지는 목포였다. 곧 군산으로 가서 영명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17년 영명 학교 교장이 되었다.1919년 3.1 만세 운동 때에는 군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끌려갔다. 린튼은 일본의 부당한 압제에 분노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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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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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천국에서 만납시다 (2)“왜 못 들어가게 해요?” 하니까“당신은 안 돼요”하는 것이었다.“나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인 신앙을 가졌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범을 보여 주신 대로 실천해온 사람인데 당신이 누구기에 못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나는 베드로요. 당신은 못 들어 간다니까.”“사람 잘못 본 게 아니예요?”“잘못 보긴 왜 잘못 봐. 당신 한국에서 온 쉐핑 아니요?”“옳아요. 헌데 왜 못들어 간단 말이예요?”“당신의 그 성급한 성질을 고치고 오지 않으면 못 들어 간단 말이요.”“알겠어요”하고 수문장 베드로와 열두 진주로 찬란하게 단장된 천국문만을 잠깐 돌아보고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쉐핑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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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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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선교사)들과의 관계 (2)그때 다른 선교사들의 집은 2층 빨간 벽돌 양옥에 해마다 페인트칠을 하고 고용인을 시켜 치장에 바빴지만 쉐핑의 집은 나무 기둥에 흙벽을 맞춘 여느 선교사 주택의 변소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초라한 집이었다. 폐일언하고 그가 서거했을 때 동아일보는 그 집을 사진 찍어 ‘찌그러진 집’이라는 제하로 보도한 적도 있었을 만큼 퇴락했어도 못 한 개 박지 않았다. 그리고 집 마당에는 호랑이가 새끼를 낳을 정도로 잡초가 무성한데도 하나님 사업에만 바빠 풀 한 포기 뽑을 틈이 없었다.다른 선교사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그렇게 비신앙적이라거나 양심적으로도 그리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쉐핑의 말이 그르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생활은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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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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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적인 존재 (2)그렇다 해서 아무 성의 표시도 안한다는 것은 한국 여성들로서는 허전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그래서 이번만은 쉐핑을 위한 행사가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그의 훌륭한 정신을 본받기 위한 계기로 삼는 데 목적이 있다는 등 옹색한 구실을 세우긴 했지만 실은 한번쯤 대접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해서였던 것이다.그래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감행했다.이일학교 교정과 근처 산에 구름떼처럼 몰려든 인파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불신자, 각계 사회단체 대표자, 교장, 교사들이었다. 식의 프로그램 거의가 그의 업적을 기리는 것이었다.이 식에서 특이하고 감동적인 것은 기독교인도 아닌 어떤 청년의 연설이었다고 한다.“저는 기독교인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쉐핑 교장이 진실로 가치있는 삶을 사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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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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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결혼을 안했나 (2)쉐핑에게 생리적 결함이라도 있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남자가 외면할 만큼 박색이었던가? 그것도 아니다.참외처럼 길쭉한 얼굴에 오똑한 코가 여자 치고는 약간 크다 할 수 있으나 보통 키를 넘는 늘씬한 체구에 비하면 오히려 균형이 알맞다. 눈동자는 봄빛처럼 빛났으며 굳게 다문 얄팍한 입술, 우유 빛깔처럼 뽀얀 혈색 등 모두가 나무랄 데 없는 미인축에 속한 편이었다. 거기에 목소리가 꾀꼬리 소리처럼 아름다운데다 리듬이 있어 보통 회화에도 듣는 사람의 귓전을 끌어당길 만큼 음악적이었다.그런데도 왜 결혼을 안했던가?결혼하는 데는 서로의 정도가 같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벧전 3:7)에서 지식이라 함은 두뇌를 말한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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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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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제주도 선교 (2)그리고 6년 후인 1914년에 남부 제주 모슬포에 윤명식(尹明植) 목사가 전라노회(全羅老會)로부터 파송되었다. 1917년에는 전라 노회가 전북과 전남 두 노회로 분립하면서 제주 북부 지방은 전북 노회가, 남부 지방은 전남 노회가 구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제주 본도(本島)에는 복음이 전파되었지만 추자도에는 복음이 들어가지 않아 미개척지로 방치되어 있었다.그 당시 광주 미션회 선교사들은 여름 한 달 동안 지리산으로 피서가는데 쉐핑만은 가지 아니하고 제주도를 순회 전도하면서 추자도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모슬포를 중심하여 확장주일학교를 설립하여 추자도에도 확장주일학교 선생을 파송한 것이 1922년이었다고 한다.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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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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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회 전도(3)“마을 부인들이 들에 나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해야 합니다. 마을 부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가마를 탈 수 있겠어요?”“탈 수 있어요. 가마꾼을 불러 주세요.”“그런데 길이 험하고 식전에 출발해야 하니까 삯을 두 배나 달라고 할 텐데요.”“두 배의 삯은 절대로 안 주겠어요.” 쉐핑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러실 작정이라면 이 집 노인장 보고 흥정을 하라고 하죠.“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곧 떠나야 하니까 서두르라고 하세요.”노인은 곧 마을로 출발했다.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 가마꾼 두 명이 문 앞에 대기했다. 그들은 흰 무명옷에 상투 위에는 작은 밀집 모자를 비스듬히 멋지게 쓰고 있었다. 쉐핑은 가마 의자 위에 올라 앉았는데 자리가 비좁아서 다리를 구부려야 했다. 가마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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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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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회 전도(2)그녀의 추상같은 명령에도 소년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목적지 마을까지는 아직도 20리 길을 더 가야했다. 그 길은 매우 험한 길이었다.“선교사님! 저는 선교사님을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요. 이 밤중에 호랑이가 덤벼들 테니까요!”“나는 하나님께서 돌봐 주실 거다. 이 일은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일이니까… 너는 가서 말(馬)을 붙잡아 오너라. 그리고 마을에서 만나자. 등불은 나를 주고 가렴.”소년은 할 수 없이 오던 길로 내려갔다. 쉐핑은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막상 오르막길을 향해 발을 내어 디디려 하니 가슴이 콱 메어 올랐다. 그녀는 코트를 여미고 폭풍우 속을 걸어 올라갔다. 바람이 그녀의 치맛자락에 휘몰아쳤다. 몇 시간이 흘렀다. 폭우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렸다.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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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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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W. C. 윈스보로의 방문 (2)3백 명 가량 모였다. 부자, 가난한 사람,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한데서 공동 생활을 하는데, 보잘 것 없는 식사를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화기애애한 가운데 종소리에 따라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행동이 매우 규칙적이었다. 열흘 간의 이 광경을 눈여겨 보던 윈스보로는 쉐핑 선교사에게 물었다.“이 사람들은 대개 어떤 생각으로 모였는가요?”“물론 성경 공부를 하러 오긴 하지만 처지는 각각 다르지요. 세상의 육적인 생활을 끊고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온 사람도 있고, 또는 신앙심을 길러 일상생활에 필요한 힘을 얻기 위해서 온 사람도 있습니다. 남편이 첩을 두었기 때문에 언제 쫓겨날지 몰라 앞길을 하나님께 의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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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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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소명엘리사벳 J. 쉐핑(Elisabeth Johanna Shepping)은 1880년 9월 26일, 독일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3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3살 난 쉐핑을 할머니에게 맡겨놓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쉐핑은 여자아이답지 않게 짖궂은 데가 있었다고 한다. 비오는 날이면 맨발로 뛰어나가 비를 맞으며 흥겹게 춤을 추었다고 한다.그녀는 가톨릭 학교에 입학하여 부잣 집 아이들 틈에서 초라한 옷차림 때문에 늘 따돌림을 받고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가 되었다고 한다. 1891년 어느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쉐핑은 독일에서 혼자 살 수 없게 되었다.쉐핑은 어머니의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들고서 어머니를 찾으러 미국으로 떠났다.영국 해협을 거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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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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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크리스마스 (2)저들이 무엇을 먹으러 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배고픈 두 포로에게는 더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라디오 소리를 들었다. 건넌방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자세히 들으니까 일본말 같았고 지금 뉴스를 읽는 듯했다. 아마 동경 방송에 틀림이 없는 듯했다.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그치더니 소녀의 노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이들이 잘 아는 크리스마스 노래였다. 감독은 로드를 돌아다 보았다. 두 사람은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짤깍 스위치가 꺼지고 노래가 그쳤다.그 즉시 심문자들이 들어오더니 가도 좋다는 것이다. 다시 두 명의 감시원 호위를 받으며 막사로 되돌아왔다. 어두움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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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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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크리스마스로드가 포로가 된 후 북녘에서 첫번째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곳은 항상 눈보라가 몰아치고 압록강 물이 꽁꽁 얼어버린 강변 어느 곳이었다.눈이 하얗게 덮인 들판을 본 탓인지, 아니면 성탄 생각을 해서인지는 몰라도 누군가 '한밤에 양을 치는 자'를 부르기 시작했다.때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한둘 합세하여 차츰 노래 소리가 커졌다. 그때 감시원이 뛰어들며 “닥쳐, 당신들 성탄을 지키려는 거지 성탄이고 그리스도고 다 없단 말야. 단지 신화에 불과한 거야. 당장 그치지 않으면 쏘아버릴 테야”라고 으르렁거리는 것이었다. 그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그것으로 그친 것이다. 밀가루 죽으로 저녁을 때운 뒤 서로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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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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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일과(日課)가 시작되기 전 미군 포로들은 막사에 주저 앉아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 고역스런 행군 명령을 기다리며 이제는 죽어도 더 이상은 행군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며 시름에 잠겨 있을 때 헐버트 로드가 불쑥 들어섰다. 병사들은 그를 쳐다보며 ‘저 영감이 웬일이야?’라고 생각했다. 로드는 병사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면서 “젊은이들! 좋은 소식이 있어 들어보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편 23편을 암송했다.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아니함은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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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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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아침 점호를 해보니 미군 병사 열 명이 간밤에 동사하였다. 호랑이는 화가 나서 즉시 매장을 하고 아무 흔적도 남기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전 부대원에게 말하기를 “행군에 발맞추기가 힘든 사람이 있다고 하니 오늘 따라 오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은 따로 나서라. 병원에 보내어 치료한 뒤 나중에 만나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로드는 직감으로 무엇이 잘못되는 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통역을 하면서 아무도 이 말에 응하지 말라고 경고를 덧붙였다. 그래도 군인 여덟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중 한 명은 이렇게 지껄였다.“한번 해보는 거야. 아무래도 걸을 수 없으니 남에게 폐만 끼치게 되지. 우리는 병원으로 가는 거야.”대열이 이동하자 로드는 호랑이가 무덤 열여덟 개를 파고 아무런 흔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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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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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압록강변 국경 지대 만포에까지 오는 동안 대우는 점점 더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하루의 양식이란 14온스의 마른 좁쌀과 제한된 몇 모금의 물뿐이었다.여기서 전쟁 포로와 민간인들은 분리되어 옛날 만주에서 넘어온 이민자들을 위한 숙소에 머물게 되었다.어느날 헐버트 로드는 맥아더 장군이 삼팔선을 넘어 북진 중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두 주일 후에 평양이 함락되기는 했으나 피로에 지쳐 있는 헐버트 로드에게 가장 가까이 이른 것은 이십 마일 밖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접근했으나 다른 쪽에서는 중공군이 부지기수로 투입 중이었다.포로에게 미친 직접적인 영향은 “빨리, 빨리”를 외치는 감시병들의 고함소리와 계속되는 강행군뿐이었다.죽음의 행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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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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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구세군은 1865년 영국 감리교 목사 윌리엄 부스가 넘쳐나는 부랑자들을 구원하겠다며 거리 선교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부스는 보다 공격적인 선교를 하기 위해 군대 조직을 교단에 차용했다.한국 구세군 역사는 로버트 호가도 정령이 1908년 10월 1일 인천 제물포로 입국하여 서울에서 구세군영문(교회)을 창설하면서 시작되었다. 1918년부터 사회봉사사업이 시작되어 고아들을 위한 육아원과 빈민 구제소를 운영하였다. 구세군 특유의 자선 냄비가 서울 거리에 등장한 것은 1928년 12월부터였다.소명헐버트 로드(Herbert Arthur Lord)는 1889년 12월 18일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1909년 11월 8일에 사관 임명을 받고, 19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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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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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소명오웬 (Clement Carrington Owen)은 1867년 7월 19일 미국 버지니아 주(Black Walnut, VA)에서 태어났다. 햄튼 시드니 대학(Hampden-Sydney College, VA)을 1886년에 졸업하고 스코틀랜드 뉴 대학(New College), 유니온 신학교(UTS, VA)를 1894년에 졸업하고,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에서 의학을 전공했다(1896년).입국그는 1894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1897년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8년 11월 5일에 입국했다. 오웬은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울 겨를도 없이 서둘러 목포로 내려가 유진 벨이 개설한 목포 선교부에 합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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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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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사이드 기념비닥터 포사이드는 괴한에게 귀를 잘리고 나서 풍토병에 감염되어 선교지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때문에 1912년 결국 미국으로 돌아갔다.포사이드는 투병 중에도 7년이 넘게 미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한국 선교에 대한 강연을 계속했다.“그들이 질병에 노출되어 무방비 상태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빨리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들을 도와줍시다.”그는 나병 환자를 돕기 위한 성금 모금과 한국으로 파송할 선교사를 모집하는 일등 많은 일을 했다.닥터 포사이드는 귀가 잘리고 나서 그 후유증과 풍토병으로 1918년 5월 9일 45세에 이 세상을 떠났다.그의 소천 소식에 많은 한국 사람들이 슬퍼했다. 당시 최흥종(초창기 윌슨의 어학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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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저널
2009.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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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는 1873년 12월 25일 미국 켄터키 주 해로스 버그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1890~1894), 1898년 루이빌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 과정을 마친 후, 쿠바에서 벌어진 미국과 스페인 전쟁 때 군의관으로 참전했다.포사이드는 1904년 8월 10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의료 선교사로 파송되어 입국했다. 그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순회 진료를 하며 고아원을 운영했다. 1905년 어느날 망골(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했던 말목 장터 근방 마을)에서 강도에게 습격 당한 부상자를 치료해 달라는 간청을 받고 마을에 찾아가 부상자를 치료해 주고 밤이 늦어 그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날 밤 포사이드는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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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저널
2009.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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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소명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은 1868년 캐나다 핼리팩스에서 태어났다. 1890년에 댈 하우지 대학을 졸업하고, 파인힐 신학교를 거쳐, 1897년 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했다.캐나다 장로교의 한국 선교 진출은 비운의 선교사 맥켄지(W. J. McKenzie)부터였다. 그는 어느 선교 단체의 파송을 받지 않았고, 후원자의 손길도 없이 “한국을 제 2의 고향으로 삼고 한국인들과 같이 살다가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그들과 같이 일하리라”는 뜨거운 가슴을 안고 와서 낯선 환경과 싸우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는 낯선 환경과 문화적 차이와 고독에서 오는 정신 질환으로 극통의 변고 끝에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맥켄지 선교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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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저널
2009.09.25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