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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만세!셔우드 가족이 부산에 도착해보니 일본행 연락선이 떠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셔우드 가족은 이 사실이 기뻤다. 그들은 남은 시간을 이용하여 조선을 떠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부산을 눈에 담아 두기로 했다.아이들은 셔우드 부부는 1926년 4월, 부산에 도착했을 때 환영을 받았던 벚나무가 만발한 해변 공원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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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11.25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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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며 (4)이제 셔우드는 해주에서와 다르게 죄수가 아닌 자유의 몸으로 헌병대에 들어갈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대장은 유쾌하게 셔우드를 맞아 주었다. 셔우드는 그에게 작별 인사차 방문했음을 전하고 “당신을 미워하는 감정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셔우드는 또한 어떤 부탁이나 무슨 선처를 바라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려 주었다.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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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10.31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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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며 (3)셔우드 가족을 위한 공식적인 환송회는 병원, 요양원의 세 기관 공동으로 요양원 예배당에서 갖기로 결정되었다. 기억에 남을 이 행사는 불청객의 참석 없이 조용히 진행되었다. 끝맺음에 있어 요양원 교회의 김 목사(Y. S. Kim)는 사태가 호전되는 대로 꼭 돌아오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송사의 마지막에 가서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많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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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10.16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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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며 (2)셔우드와 메리안은 해주 요양원이 확고한 경제적 기반 위에 서서 영구적으로 운영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셔우드와 메리안은 한국을 떠나기 전에 이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그 조치의 일환으로 셔우드와 메리안은 해주 요양원을 후원할 재단을 구성했다. 이름을 ‘호진 재단’이라고 지었다. 요양원의 땅, 건물 등 소유물은 결핵 병원 요양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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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10.02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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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며1940년 10월 9일, 미국 정부가 보낸 지시가 셔우드의 라디오에 수신되었다. 그 내용을 미국 총영사인 마시(O. Gaylord Marsh) 씨가 확인했다. 그 훈령은 모든 미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 특히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철수시킬 것, 그러기 위해 두 척의 여객선을 11월 6일 제물포에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호놀룰루-샌프란시스코를 항해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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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09.18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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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재판 (2)셔우드와 메리안 부부는 검사에게 두 번이나 불려갔다. 육군에서는 셔우드와 메리안 부부에 대한 사건철을 이첩했으므로 수많은 서류들을 재확인하는 일로도 시간이 걸렸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나자 셔우드와 메리안 부부에게 법정에 출두하라는 호출장이 왔다. 셔우드와 메리안이 법정에 들어가서 얼마간 기다리자, 판사와 검사, 서기들이 들어와 셔우드와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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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09.04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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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재판조선으로 들어오거나 외부로 나가는 모든 편지들은 철저한 검열을 받았다. 셔우드와 메리안은 시베리아 감옥에 갇힌 한 러시아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자기 가족과 이별하기에 앞서 비밀 암호를 약속했다고 한다. 식량이나 다른 물품들을 구하기 어려울 때는 녹색 잉크로 편지를 쓰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 지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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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08.20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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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소리 (8)메리안의 평양 여행은 별일이 없었으나 아직 말썽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셔우드와 아이들이 해주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유리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필리스는 포플라 나무들이 늘어져 있는 도로에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움직이고 있는 물체를 보았다. 그것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섯 사람들이 찬 긴 칼이었다.“아빠, 저것 봐요. 큰 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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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08.08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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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소리 (7)셔우드는 메리안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렸다. 메리안이 걱정하고 있을 게 뻔했으므로 심문관에게 대담하게 “내가 안전하다는 점을 우리 가족에게 전보로 알려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놀랍게도 그 심문관은 쉽게 승낙했다. 그러나 셔우드는 그가 정말로 전보를 보냈는지 보내지 않았는지 알 수 없어 초조했다. 나중에 확인된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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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07.24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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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소리 (6)다음날 아침, 셔우드는 작은 성경책 한 권만 들고 시간에 맞춰 헌병대로 갔다. 셔우드가 들어선 작은 사무실에는 장교가 한 사람 앉아 있었다. 해주의 헌병들은 틀림없이 셔우드가 시간에 맞춰 출두할 것이라고 다짐했으나 자기네들은 반신반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셔우드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제 보니 당신은 약속을 지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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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06.25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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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소리 (5)불행하게도 Dr. 홀 부부는 당시의 경험을 기록한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갖고 있으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Dr. 홀 부부가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기상 같은 것들뿐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것까지도 위험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몇 달 후에 Dr. 홀 부부는 미국에 있는 후원자들에게 자기들의 경험을 자세히 써서 보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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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05.27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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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소리 (4)외국인에 대한 일본 육군의 적대감 때문에 모든 선교사들은 신경전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떤 서양인들은 “더 이상 이런 환경에서는 참을 수 없다”며 조선을 떠났다. 셔우드와 메리안 부부도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셔우드와 메리안도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의논을 했다. 셔우드와 메리안은 아직은 봉사해야 할 일이 많고 조선 사람들에게도 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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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05.01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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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소리 (4)셔우드는 그의 조급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솔직히 말해 이 질병은 나로서도 처음 보는 병이다. 그러나 모든 증세를 종합해 볼 때, 런던의 열대병 학교에서 공부한 페스트(Pasteurella pestis)로 인한 희귀한 병인 것 같다”고 말하고는 잠시 그가 생각할 틈을 주었다. 그는 ‘Pasteurella pestis’란 병명을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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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04.18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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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소리 (3)메리안은 해주 공립병원의 군인 병동에 입원해 있는 일본군 부상병들을 위한 위문을 생각했다. 그녀는 해주에서 활약하고 있는 일본 및 한국 여성들과 ‘어머니 클럽’의 회원들로 위문단을 만들었다. 모두들 열성을 가지고 여러 위문품도 준비했다. 그러나 위문단이 병동에 도착하자 강경한 제지를 받아 그대로 돌아왔다.“일반인은 절대 출입 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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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04.01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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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소리 (2)전쟁의 바람은 서서히 해주까지 불어왔다. 일본 육군은 Dr. 셔우드의 무선 라디오를 빼앗아갔다. 이때부터 셔우드는 국제 뉴스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장파 라디오를 들으면 선전만 나올 뿐이었다. 유럽에서 승리한 히틀러, 일본의 빛나는 만주 정복, 미국과 영국의 중국 정부 후원으로 인한 일본의 분노, 이에 대응하는 각처의 외국인 세력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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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02.25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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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소리Dr. 홀의 가족은 예정대로 1939년 3월 11일, 미국을 떠났다. Dr. 홀의 가족이 서울에 도착하고 보니 한국에는 1939년이란 해가 오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런 해는 없었다. 한국의 달력은 그 사이에 일본 달력으로 바뀌어 있었다. 일본 달력이란 일본의 첫 황제인 메이지로 시작하는 연호를 말한다. 모든 공문서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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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02.19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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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인 (4)Dr. 셔우드 홀 가족은 이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에밀리가 Dr. 홀 가족을 엑하트 광산에 데려다 주는 차 속에서 꼬마 필리스가 주일학교에서 배운 ‘The Bible’이란 노래를 불렀다. 에밀리는 그때 깊은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Dr. 홀 가족이 차에서 내릴 때 에밀리는 Dr. 홀의 손에 수표 한 장을 쥐어 주었다. 수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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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01.28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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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인 (3)1939년 6월은 셔우드의 어머니가 여자 의과대학을 졸업한 지 35주년을 맞는 해였다. 학교에서 축하식이 있어서 셔우드는 메리안, 윌리엄과 함께 필라델피아에 가서 이 식에 참석했다. 셔우드의 어머니는 1889년에 졸업한 아홉 명의 졸업생과 함께 금메달을 받았다. 그 해의 졸업생은 모두 41명이었는데 셔우드의 어머니가 가장 어렸다고 한다. 셔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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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5.01.07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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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인 (2)셔우드의 교회 순방 계획에 적힌 첫 교회는 뉴욕 빙햄턴에 있는 태버나클 감리교회와 리버티 감리교회였다. 태버나클 감리교회는 프레드 해스킨즈(Fred Haskins) 여사를 기념하는 사업의 하나로 ‘해스킨즈 성경반’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해스킨즈 여사는 별세할 때까지 Dr. 홀 부부가 조선에서 의료 선교 사업을 할 수 있게 경제적 책임을 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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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4.12.19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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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자(대리인)1938년 셔우드 부부에게 두 번째 안식년 휴가가 돌아왔다. 셔우드 부부는 호놀롤루를 경유해 캐나다의 밴쿠버로 향하는 기선을 예약했다. 배는 1938년 7월 27일, 일본을 출발했다.밴쿠버에 도착하니 사촌인 루이스와 아더 사이먼이 보낸 편지가 셔우드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밴쿠버에서 얼마 멀지 않은 워싱턴의 자기 집으로 오라는 초청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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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2014.11.25 0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