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입국이곳 부산 시가는 일본인들이 1443년에 이미 정착한 곳이며 폭이 가장 넓은 지대에 흩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일본식 기와지붕이 있는 2층집을 볼 수 있었는데, 가끔 높은 건물들도 보였다. 대부분의 한국식 초가집들은 좁다란 지대를 따라 옹기종기 몰려 있었으며, 뒤로 솟아 있는 높은 언덕이나 산에는 사람 사는 흔적도 없고 나무도 없었으며 가꾸지도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사실 기대를 가질 만한 곳은 못 되었다.‘우리는 적어도 우리 선교사 중 한 분이 부산에 머무르고 있다고 들었다. 마침내 한 언덕에 외국식 방갈로가 눈에 띄었다. 그것이 바로 찾고 있던 집이었다. 가족들은 배에 남겨두고 나는 거룻배로 해안에 나가 울퉁불퉁하고 꼬불꼬불한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1.01.21 00:00
-
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소명 (2)'그와 같이 항해중인 선원과 대부분의 동양인 승객이 생활하고 있는 배의 아래층을 돌아보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나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었다. 그때, 서양에 오래 살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병든 중국인 하나가 죽은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조국을 떠난 중국인은 누구나 죽기 전에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대의 소망이었다. 만약 그가 중도에 죽으면, 그의 시체를 조국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그래서 배에 탄 모든 중국인들은 그들이 항해중에 죽게 되면 그들의 시체를 중국으로 보내 준다는 조건으로 선박회사와 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배에서 중국인이 죽으면 계약을 이행할 수 있도록 시체를 방부처리해야 했다.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1.01.14 00:00
-
소명 (2)‘우리가 결심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는, 캐나다 대학선교협회의 사업을 확장하는 데 계속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 의과대학의 작은 학생협회는 온타리오의 모든 대학 학생단체를 움직이게 할 만큼 성장했고, 또 이 사업에 대한 관심을 북돋게 하기 위한 순회 간부를 지원하고 있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하아디 박사는 미국 남감리교회 한국 선교부와 합세하고 대학들도 다방면으로 선교사업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힘쓰고 있었다. 우리 조직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는 협회 회원 대부분이 모두 다 각기 선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우리가 한국으로 가는 것을 수락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나를 착실한 장로교인으로 만들어낼 수 있겠느냐는 나의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1.01.04 00:00
-
대학교수 (2)곧 나는 시장 아들의 출산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상 시장이 첫번째로 선택한 의사는 내가 아니었다. 시장은 두 번 결혼했고 그의 첫번째 아내는 첫 아기를 낳을 때 죽었다. 그래서 그는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를 청했다. 그는 무리한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출산 때가 되었을 때 그 산부인과 의사는 다른 환자 때문에 몹시 바빠서 올 수가 없었다. 그는 걱정하는 시장에게 나를 대신 보내겠다고 말했다. 영광의 순간이었다. 나는 시장과 그 아내를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되었고, 내가 치료를 마치고 그 집을 떠날 때, 나는 그들에게 그 의사가 오늘 중으로 꼭 들를 것이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12.17 00:00
-
교장의 충고 (2)올리버는 교장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양쪽 의과대학장들과 상의한 끝에 토론토 의과대학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 대학은 교수진이 좋고, 약학 관계로 올리버가 공부한 데 대해 1년간의 학점을 인정해 주기로 했다. 따라서 그는 4년 대신에 3년만 공부하면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그는 또다시 뜻하지 않게 내 인생행로가 바뀌게 되었구나하고 생각하였다. 그는 약학을 공부할 때처럼 의학 공부를 열심히 했고, 그래서 50불의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책을 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올리버가 약학 강의를 인계 받고 월급이 두 배로 되었을 때, 제니와 그녀의 부모에게 편지를 해보았다. 모두들 더 지체할 것이 없이 결혼하라는 의견이었다. 그들은 1885년 7월 28일, 마침내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12.10 00:00
-
의사가 된 올리버 (2)그의 가장 큰 불만은 오후 9시에 약방 문을 닫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여자 친구를 만날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제니의 집은 약방에서 한 블록 떨어져 있었는데 매일 아침 마다 그녀가 집 앞을 쓸고 있을 때, 올리버도 밖으로 나와서 서로 아침 인사를 교환하곤 했다. 올리버는 “그녀의 엄마는 내 편이야. 그래서 내가 저녁에 방문하면 그녀는 파이나 케이크나 음료수를 쟁반에 담아서 응접실로 들여오곤 하지, 그분은 정말 멋있는 엄마야. 그분은 주위의 청년들 중에서 누가 사윗감으로 적합한지를 알거든”하고 생각했다. 첫해가 다 지나갈 무렵, 수석 사무원이 마니토바에 새로 건설된 도청 소재지인 위니페이로 가고 싶어했다. 올리버는 자기의 업적으로 봐서 자기가 그 자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12.03 00:00
-
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다시 학교로 (4)올리버에게 단 한 번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그는 학생들이 숙제를 선생 책상 앞에서 낭독하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그때 큰 학생들이 일어서서 싸움을 하였다. 둘 중에 더 큰 학생이 한 이사의 아들이었는데 그가 교실 내에서 싸움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싸운 이유를 대라고 했더니 자기 변명을 하였다. 올리버는 “조지군! 여기는 싸움하는 곳이 아니야. 앉아서 공부하고 우리 방과 후에 다시 이야기 하자.”고 하였다. 두 아이는 앉았으나 다시 싸우기 시작하였다. 올리버는 벌떡 일어서서 달려가 주먹을 쥐면서, “조지! 앉지 않으면 두들겨 줄 테다.” 라고 말했다. 조지는 선생보다 훨씬 컸지만 엉겁결에 말 한 마디 못하고 앉고 말았다. 방과 후,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11.19 00:00
-
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다시 학교로 (3)얼마 후 시내로 갔던 사람들이 곧 돌아와서 저녁식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저녁식사 때가 지나자 이웃사람들이 두서너 명씩 왔다. 외투들을 벗고 좀 앉았다가 가려는 것 같은 모습들을 보고 올리버는 그날 밤 무슨 모임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그렇습니다. 오늘이 10월 31일인 것을 모르십니까? 모든 마을 사람들이 오늘 저녁에 여기에 모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꽤 큰 집인데도 온 집안에 사람들이 가득히 모여 있었다. 먼저 온 사람들은 다른 농장에서 온 것 같았고, 방금 온 젊은이와 두 부인은 옷차림으로 보아 시내에서 온 것 같았다. 올리버의 그날 저녁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렇다.‘시내에서 온 세 사람과 나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11.12 00:00
-
다시 학교로 (2)강의 근원은 원래 방대한 숲이었으나 벌목꾼들이 나무를 다 베어 버렸기 때문에 암석의 고지대인 남서쪽에서 시작하였다. 벌목꾼들의 대다수는 농부였으며,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겨울 동안에 벌목을 하여 여분의 수입을 얻고 있었다. 통나무들은 어떤 것은 둥글고 어떤 것은 네모진 재목으로 잘라졌으며, 이것들은 말에 끌려 목재를 띄울 수 있을 만한 가장 가까운 강 언덕으로 운반되었다. 그리하여 봄이 되어 눈과 얼음이 녹아 수량이 증가되면 강물에 굴려넣어 주류로 떠내려 보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나무를 따라가며 얕은 곳이나 강가 웅덩이에 걸리지 않도록 감시하였다.봄마다 뗏목이 떠내려오는 것은 시내 아이들에게 큰 구경거리가 되었고 모든 소년들은 나무꾼이 되었다. 학생들은 하나는 나무토막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11.05 00:00
-
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다시 학교로 (2)그가 알몬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을 동안, 캐나다 의회에서 논의되었던 가장 중요한 정책은 아마도 캐나다 횡단 태평양 철도의 건설을 위한 재정지원 방법을 결정하는 일이었을 것이다.이 철도는 인구 밀도가 높은 동부 캐나다와 광활하지만 인구 밀도가 낮은 서부 캐나다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여 국가 발전에 긴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의회 내의 보수파나 진보파가 다같이 그 중요성에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그러나 철도 건설 방법론에 있어서는 양파가 대립하였다. 캐나다의 보수파 정치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였던 John A. McDonald가 영도하는 보수파 의원들은 정부의 지원하에 개인 회사가 건설하는 것을 주장하였고, 진보파 의원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10.29 00:00
-
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야학 선생 (2)“얼마 안가서 직공들은 다시 근로 시간을 1일 10시간으로 단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첫 시도에서 이미 성공을 보았기 때문에, 이 요청은 아주 쉽게 받아들여졌다. 1일 10시간제를 실시하였더니 생산은 1일 10시간 30분 하던 때보다 더욱 증가하여 공장주나 직공들은 다같이 만족할 수 있었다. 이번 단축은, 매일 아침의 일 시작하는 시간을 6시 30분에서 7시로 늦추어 모든 직공들에게 긴장된 아침일과를 덜어 주는 방향으로 정하였다.”어느 토요일 오후 그들 부자가 공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버지는 “올리버야! 오늘이 네가 여기서 일하는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라고 하여 아들을 놀라게 하였다. 올리버는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해고를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10.22 00:00
-
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캐나다 이민 (3)올리버는 먼저 솜틀부(picking machine)에서 일하게 되었다. 솜틀은 빗장에 돌기가 붙어 있는 기계이다. 올리버가 할 일은 엉켜 있는 솜털 조각을 이 기계에 멕여서 털뭉치로 만드는 것이었다. 천의 필치 끝에서 잘려져 못쓰는 조각들도 이 기계에 집어넣었다. 이 기계를 천 조각이 지나가는 동안, 섬유는 분해되어 길이가 다른 털섬유와 합하여 다소 질이 낮은 천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천은 신선한 털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이 튼튼하였다.올리버는 일급 40전, 다시 말하여 월급 10달러 정도의 보수로 일을 시작했다. 그는 하루 11시간, 주 6일간, 매주 총 66시간의 일을 하였다. 그는 겨우 11살이었지만 매일 아침밥을 먹고 6시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10.15 00:00
-
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캐나다 이민 (2)캠벨포드에서 그는 처음으로 죽음을 알게 됐다. “내가 물에 빠졌던 경험을 겪었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한다.“하루는 학교에서 늦게 돌아왔을 때였다. 이웃사람이 달려와서 나의 어머니에게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기겁을 하여 미친 듯이 사고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고 보트를 탄 사람들은 시체를 찾기 위해 댐 상부의 깊은 곳을 뒤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뗏목에 매달려 제대로 조정하지도 못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때 내가 운집한 군중들 사이에 나타났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죽었다는 애가 여기에 있으니!”그러나 진짜 물에 빠진 것은 올리버가 아니라 그의 친구였던 것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10.08 00:00
-
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어린 시절올리버 R. 에비슨은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오크셔(York Shire) 주 웨스트라이딩에 있는 재거 그린(Jagger Gree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그 계곡에 있는 모직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때에 영국에서 방직기계가 발명되어서 방직공장이나 모직공장에서 일하던 많은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캐나다 이민이러한 환경 하에서 당시 영국에 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부친은 대영제국 식민지로 이민하는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뉴질랜드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올리버가 6살이 되려는 때에 마침내 가족을 이끌고 미주로 건너갔다. 이리하여 1866년 12월, 온 가족은 리버풀에서 뉴욕으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10.01 00:00
-
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맹인 점자 교육로제타는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더 많은 일에 열중할 것’을 하나님께 약속했다. 닥터 로제타는 병원일로 바쁘게 지내는 동안 슬픔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여성 치료소 광혜여원(廣惠女院)은 1898년 6월 18일 문을 열었다.평양에서 닥터 홀의 첫 신자가 된 오석형의 가정에 앞을 못보는 어린 딸 봉래가 있었다. 닥터 로제타를 찾아오는 환자 중에는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들이 많이 있었다. 그 당시 그들은 매우 처참한 상태에 있었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소외되어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결국은 보행 능력까지도 잃게 된다. 닥터 로제타는 눈 먼 어린이들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인들이 그녀의 순수한 의도를 곡해할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09.24 00:00
-
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기홀 병원 설립 (2)그 후에 닥터 포웰은 조이스(Joyce) 감독과 한국 선교회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1897년 2월 1일, 홀 기념 병원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개원되었다. 이 건물은 선교회로부터 아무런 경제적 원조도 받지 않고 친애하는 고 닥터 홀의 자기 부정(否定)과 의사인 그의 아내, 한국의 친절한 친구들, 그리고 고국 친지들의 노력으로 세워졌다.’로제타는 미국에서 평양의 홀 기념 병원을 세우는 데 보탤 모금을 하면서 『윌리엄 제임스 홀, M. D.의 생애』를 출간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했다. 1898 5월에는 평양에 여자 병원 광혜여원(廣惠女院)을 세웠다.에디스 마거리트로제타는 뉴욕 옛집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은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09.17 00:00
-
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결혼 (2)청일 전쟁터가 된 평양은 사방에 버려진 청나라 군인들의 시체, 죽어 넘어진 군마들의 썩은 냄새, 파괴된 집들과 버려진 무기, 그리고 기아 상태에 허덕이는 시민들의 모습 등으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었다고 한다.전쟁 중에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 수없이 병원으로 몰려들었고 닥터 홀은 환자들을 돌보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과로가 겹쳐 쓰러지고 말았다. 체온이 40도까지 오르고, 말라리아인지 장티푸스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전염병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닥터 홀의 병세는 시시각각으로 악화되었다.마펫과 리(G. Lee) 목사는 닥터 홀을 부축하고 대동강에서 배를 타고 진남포까지 가서 제물포로 가기 위하여 옮겨 탄 배는 6백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09.03 00:00
-
이번 호부터 연재되는 로제타 셔우드 선교사편은 2009년 3월 연재되었던 셔우드 선교사편에 새로운 내용을 보강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소명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는 1865년 9월 19일 뉴욕 리버티에서 아버지 로즈벨트 셔우드(Rosevelt Sherwood)와 어머니 길더슬리브 셔우드(Phoebe Gilder Sherwood)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 고향집 농장에서 자랐으며, 리버티에 있는 체스넛 릿지 학교(Chestnut Ridge School)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후 리버티 노멀 인스티튜트(Liberty Normal Institute), 뉴욕 오스웨고의 스테이트 노멀 스쿨(State Normal School)에서 공부했다. 이곳에서 초등학교와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08.30 00:00
-
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선교 사역멘지스의 초기 사역에선 성경 공부반과 순회 활동 외에도 고아들을 위한 사역이 중요한 사역이었다. 당시는 전쟁으로 인한 고아가 아니라, 극심한 가난으로 인해 아이를 부양할 수 없을 때 버려지는 아이들, 혹은 신체 장애가 있어 부모가 부양하기를 기피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이런 아이들을 모아 양육하기 위해 1893년 부산지방 최초의 고아원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미오라(Myoora) 고아원이었다. 물론 멘지스가 전적으로 이 고아원을 책임 진 것은 아니었다.처음에는 페리양이 맡았던 일이다. 그러나 페리가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 멘지스가 관리 책임을 맡았다. 호주 여선교사들이 처음부터 고아원 경영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어느날 멘지스의 집 앞에 한 아이가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08.16 00:00
-
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어린 시절벨리 멘지스는 로버트 멘지스(Robert Menzies)의 10남매, 곧 7남 3녀중 장녀로 1856년 7월 30일 발라랏(Ballarat)에서 출생하였다. 그녀의 아버지 로버트 멘지스는 스코틀랜드 덤프라이스(Dumfries)에서 살다가 1855년 호주의 빅토리아 주의 금광 도시인 발라랏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호주 빅토리아 주 발라랏에는 금광이 발견되어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각광받는 사업으로 부상하였고 후일 이곳에 많은 중국인들이 유입하게 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로버트 멘지스도 이민을 결심하고 22살 때인 1855년 가족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주하였으나 한창 일할 나이였던 46세의 나이로 1879년 세상을 떠났다. 집에 화재가 났음을 알리는
선교사열전
크리스찬저널
2010.08.0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