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인간의 수명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는데, 요즘 칠십이 넘어 보이는 남자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7-8년 더 길게 생존한다는 의학 통계가 있어서 할머니들은 우리 주위에서 오래 전부터 늘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70세가 넘은 듯 보이는 남자들도 꽤 많아졌습니다. 나도 3년 반 후에는 70이 되겠지만, 나이 많은 남자들이 어기적거리고 다니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마치 좀비가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나는 그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는 998834(?)를 바란다지요?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사흘을 앓고 나흘 후에 죽는 것을 바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여자들의 경우이지요. 남자들은 당당하게 일찍 죽어야 되지 않을까요? 한국 남자들의 노화된 얼굴들을 볼 때, 이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연상되고 또 저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이 연상되곤 합니다. 오랫동안 피가 섞여 왔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한국인의 형용을 나누면 두 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두족(머리가 큰 사람들남방계)과 소두족(머리가 작은 사람들북방계)입니다. 그런데 요즘 새로운 족속이 등장했습니다. 성형족(인공 수술계)입니다. 오랜 후에 자연 노화와 인공으로 인한 노화 멈춤의 충돌은 어떤 모양을 만들까요?

고 한경직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그분과는 일면식도 없습니다. 서울 영락교회에서 은퇴하신 후에 그 교회의 재정적 지원도 마다하시고, 남한산성에 있는, 그 교회 교단에서 운영하는 은퇴자 숙소에 계시면서 오히려 더 활발하게 활동하셨습니다. 남한산성의 은퇴자 숙소의 거주 환경이 아주 열악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교단에서 나오는 월정 생활비마저도 최저 생계비만 남기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또 목사님은 “후배 목사들에게 한 말씀해 주시죠”라는 요청에 "목사님들, 예수를 잘 믿으세요”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했다는 죄의식이 평생 그분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불교의 큰 스님이셨던 법정스님은 무소유를 자랑하셨고, 이를 책으로도 펴내셨지만 한경직 목사님은 그것을 자랑치 아니하시고 묵묵히 실천하셨던 분입니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우리 기독교에 계셨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반기독교 사이트에 가 보니 “목사놈들 주접을 떤다.” 고 주접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고들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접이라는 단어를 “국립국어원 표준 국어 대사전”에서 찾아 본 결과, 세 가지 뜻 가운데 하나가 “옷차림이나 몸치레가 초라하고 너절한 것” 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주접'이라는 단어의 바른 뜻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떠받드는 분들을 세상은 이렇게 대접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또 성도인 나도 다음과 같이 불리고 있습니다. “개독교를 믿는 놈.” 이렇게 세상은 기독교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습니다.

“높은뜻 숭의교회”의 주일 예배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명동에 있는 숭의여전(전 숭의여고) 강당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잠깐 동안 예배 모습을 보여 주고는, 어느 여자 신도와의 인터뷰를 보여 주었습니다. 여자 신도는 “학교측에서 강당을 증개축하기 때문에 다음 달부터는 강당 사용을 할 수 없다고 통보하였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전혀 다음 계획을 말씀하시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니 답답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후 소식에 의하면 서울을 4등분하여 4개 지역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교회 사무실은 종전 위치에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신선한 발상이 아닐까요? 다음은 높은 뜻 숭의교회의 담임인 김동호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의사는 병원의 제사장이고, 목사는 교회에서 제사장이고, 교수는 학교에서 제사장이다. 그래서 만인이 다 제사장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두 무대와 역할이 있다. 하나는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이다. 교회라고 하는 무대의 주연은 목사이고 교인들은 조연이다. 그러나 세상이라고 하는 무대에서는 교인이 주연이고 목사는 조연이다. 한 번의 주연과 조연으로 목사와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 그러나 그 동안 교회와 교인들은 세상이라는 무대를 잊고 있었다. 오직 교회만 무대인 줄 알았다. 세상이라고 하는 중요한 무대를 잃어 버리고, 교회에만 몰려서, 누가 주연인가만을 놓고 쓸데없고 지루한 싸움을 계속했다.”

이런 분이 기독교에 계신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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