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고대의 교회 (2)

Ⅱ. 승리하고 그 위치를 확립하는 교회

1.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다스리는 막센티우스(Maxentius)와 패권을 놓고 전쟁 할 때에 티베르(Tiber)강의 밀비안 다리(The Milvian Bridge)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서편에 지고 있는 태양 위의 십자가를 본 것이다.

십자가의 빛에 나타난 글자는 Hoc Signo Vinces(In this sign I Conguer)이었다.

312년 10월 28일에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완패하였고, 막센티우스는 티베르 강에 빠져 죽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로마제국의 서방을 완전히 통치하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이긴 것이 크리스천들의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때문임을 알게 된 대제는 밀라노 칙령(313년)을 발표하여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다른 종교들과 함께 법률 앞에 동등한 발판을 얻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로마의 귀족들이 이단종교를 고집하자 의회(원로원)를 비잔틴으로 옮겨서 새 기독교 제국의 수도로 정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거대한 교회당을 곳곳에 건립하였으며 주일의 작업을 금하여 주일성수의 기점이 되었다.

2. 세계가 교회를 침략하다

밀라노 칙령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자들은 영예와 물질적인 이득을 얻게 되었다. 신자의 이름은 군사적으로 인정되었으며 사회적으로 승진의 수단이 되었다. 그 결과로 수천수만의 이교도들이 교회에 합류하였는데 이름뿐인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교주의에서 승리한 교회는 그 순간부터 이교주의로부터 가장 큰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교회의 신자 숫자는 많이 늘어났으나 질적인 면에서는 저하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에 큰 타락의 홍수를 가져왔다.

첫 3세기 동안 교회는 무수한 박해를 당하면서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확장되었으나, 그 이후는 전쟁에 편승하여 발전된 것이다. 로마군대의 상징은 독수리였으나, 이제 십자가로 교체되었다.

3. 교회사의 전환점

초대교회의 전환점 : 스데반이 순교했을 때 예루살렘에서 교회의 축출이 있었다. - 유대와 사마리아 팔레스타인으로의 복음전파

제2의 전환점 : 바울과 그 외의 사람들이 펼친 선교 활동이다.

제3의 전환점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인하여 기독교가 공인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하여 기독교는 확대되었고 로마의 전통과 희랍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심한 견제를 받다가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를 탄압하게 되는데 그는 배교자 율리아누스라고 불리운다. 그의 뒤를 이은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로마제국을 동서로 분할하였으며 388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박해를 통하여 신자들이 흩어졌고, 그 신자들을 통하여 교회가 각지로 퍼져 나갔으며, 평화의 기독교가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세계로 퍼져나갔다. 기독교의 공인에 의하여 기독교는 더욱더 발전되었고 또 이름뿐인 신자들 때문에 교회는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III. 발전되고 강화되는 교회(AD 325-451년)

1. 교회 회의(The Role of Church Councils)

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많은 종교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들 회의에 교회의 지도자(감독)들이 모여서 중요한 문제들을 토론하였다.

최초의 종교회의는 예루살렘에서의 사도들의 회의였으며(행 15장), 이방에 교회가 확대된 결과로 일어난 문제들을 숙고하려고 소집되었다. 교회가 단일화되고 강화되는 데는 교회 회의가 그 역할을 감당해 왔다. 이 종교회의 가운데 특별히 아래의 4개 회의를 언급하기로 한다.

1) 니케아 회의(AD 325년)

기독론의 핵심인 마 16:16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베드로의 간증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은 참 아버지이신가 하는 문제로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 아리우스(Arius)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알렉산더 그리고 그의 계승자 아다나시우스는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본질이 아니다. 즉 하나님이 아니고 피조물이다”라는 주장을 했다. 이에 반해 아다나시우스는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시다(동일본질론)”라는 주장을 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예수를 나의 구속자로 알며, 하나님보다 못할 수 없다(Jesus whom I know as my redeemer, cannot be less than God)”라는 주장을 한 것이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성자는 성부와 유사한 실질이라는 유사본질을 주장하였으나, 이들은 본질적으로 아리우스주의자들이었다.

아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니케아 회의 전인 AD 321년에 열린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파문을 당하였다.

니케아 회의 결과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리하고 처벌하였으며, 니케아 신경(The Nicaea Creed)이 완성되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따른 참된 설명이 교회의 신앙으로 채택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인성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신성은 기독교의 신앙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신앙이며, 니케아 회의 이래 모든 기독교 신자들의 중심 신앙이 되었다.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요 유형물과 무형물의 창조주이신 한 하나님을 믿으며, 결코 창조되지 않았으며 발생되신 아버지와 동질이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2) 콘스탄티노플 회의(AD 381년)

니케아 회의 결과에 불복한 아리우스는 황제들 그리고 법정의 심판관들의 지지를 받아 그 세력을 키워 나갔다. 아다나시우스 사후에 갑바도키아의 뛰어난 세 교부, 바실(가이샤라), 그레고리(나지안즈) 그레고리(닛사)에 의하여 정통적인 기독교 진리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종교회의에서 니케아 신경의 교회신앙을 재확인하였고(성부와 성자는 같다), 성령(Holy Spirit)의 신성에 관하여 언급되었으며 삼위일체 교리(the doctrine of Trinity)가 기독교 신앙의 기본 항목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아리우스주의자를 최종적으로 정죄하였다.

3) 에베소 회의(AD 431년)

펠라기우스(Pelagius)에 의하여 창시된 펠라기안 주의는 인류는 아담에서부터 타락하지 않았다면서, 원죄와 사람의 전적 타락과 예정론을 부인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안 주의에 대항하여 교회를 지켜 나갔고,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펠라기안 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 편집자 주 : 이학진 장로는 교회 안팎에서 말씀 인도자로 사역하고 있다. 성경 교재인 『성경 통독과 이해를 위한 싹 난 지팡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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