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송이 꿀처럼 달콤할 때까지 열심히 기도해 주세요.”

그런 말을 교회에서 자주 듣는다. 성경에 있는 말씀이니까, 그리고 그런 체험을 간증하는 성도들도 흔히 만날 수 있으니까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여호와의 법은...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 19:9-10)는 성경구절도 있고,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 119:103)도 애송 구절 아닌가.

현대에 와서는 단 것들이 지천으로 많게 되었다. 각종의 설탕도 많이 있고, 기기묘묘한 향기를 뿜어내는 사탕도 얼마나 흔하던가. 하지만 그런 시대에도 꿀맛은 여전히 달콤하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꿀을 만드신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닐까. 성경 말씀의 맛이 꿀송이처럼 달콤할 때까지 체험하라는 분부 말이다.

꿀 하면 먼저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복지가 바로 그것이다. 출애굽기부터 매우 자주 나오기도 하고, 설교를 통해서도 매우 낯익은 표현이다. 그런데 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바로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해석하는 성경 연구가들도 많이 있다. 게다가 한 가지 더 보탠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샘물처럼 흘러넘치는 교회’ 그곳이 바로 가나안 복지 아닐까.

그런데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건강 정보에 따르면 달콤한 것은 되도록 먹지 말아야 한다. 사탕을 많이 먹으면 이가 쉽게 썩는다는 건 아주 옛날 이야기다. 지금은 흰 쌀밥, 밀가루, 미원, 설탕, 맛을 내는 소금 같은 흰 것은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아야 한다는 경고이다.

하지만 그건 최근의 건강 정보가 아니라 옛날부터 있어왔다. 명심보감에서도 '양약은 입에 쓰고, 충언은 귀에 거슬린다(良藥 苦於口 忠言 逆於耳)'라고 하지 않았나. 이 금언을 뒤집으면 무엇이 되는가. ‘독약은 입에 달콤하고, 해로운 말은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뜻이 된다.

그래 그럴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도 그런 경우가 없지 않다. 우선 감탄고토(甘呑苦吐)란 말대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이들’은 결코 큰 지도자가 되지 못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대표적 사례이다.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원로들의 충언은 쓰디쓴 것이라 듣지 않았다. 그리고 동년배들이, ‘당신 새끼손가락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다’며 부추기는 말에 홀려서 정치했다가 폭삭 망하고 말았다 (왕상 12장 이하).

그러나 그 할아버지 다윗 왕은 정반대였다. 대언자 나단이 그 앞에 서서, “당신이 바로 그런 범죄자요”라고 지적했을 때 그는 그 자리에서 회개했다. 연산군 같으면 당장 칼을 빼어 나단의 목을 치지 않았을까.

요한계시록에는, 천사의 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가져다 먹으니 입에는 달콤한데 배에는 쓰디쓰다는 말씀(계10:10)도 있다.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는 달콤하지만 그걸 실천하려면 고생을 많이 해야 한다는 뜻으로 푼다. 성경말씀을 배우는 참된 도리라고 생각된다.

말씀의 신비에 푹 빠져들 정도로 즐겁게 공부하지만, 그걸 실천하려면 십자가를 져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목숨을 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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