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늦은 밤, 호랑이가 배가 고파서 마을로 내려왔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어린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에 냉큼 달려가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상황을 살폈다. 잠 안 자고 울기만 하는 아이에게 엄마가, “얘, 너 울음을 딱 그치지 않으면 여우가 와서 물어간다”며 겁을 주었다. 아이는 더 크게 울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호랑이가 물어간다며 수위를 더 높여 아기를 협박했다. 아이는 더 크게 울어댔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엄마가 아이 이름을 부르며, “여기 봐라, 곶감이다, 곶감-” 했더니 단번에 울음을 딱 그쳤다.

호랑이는 이 말을 듣고 간이 콩알 만해졌다. 자기가 동물의 왕인 것을 자부하고 있는 터인데 도대체 나보다 더 무서운 게 있어? 곶감이란 놈이 무어지? 그러면서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했다. 누구나 다 아는 싱거운 옛날 이야기 한 토막이다.

그런데 만약 철부지가 아니라 철든 소년이 말썽을 계속 부린다면 무어라고 겁을 주어야 효과 만점일까. 종아리를 때린다? 밥 안 준다? 학교에 안 보낸다? 집에서 나가라? 그런 것이 안 통하면 마지막 비법이 있다. “너 죽여 버리겠다.” 그것 아닐까. 그것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겠다.” 하면 태연자약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보라. 제 아우 아벨을 쳐 죽인 가인이지만,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4) 하며 죽음 앞에 벌벌 떨었다. 모세 같은 대담한 인물도 바로 왕이 죽이려고 찾으니 즉각 미디안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그런데 실상 이 사실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가장 엄중하게 경고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사형 티켓을 내어 미신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6:23).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런 것들이 모두 사형 티켓 아닌가.

성경은 인생의 길을 여러 가지로 가르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생이란 사망과 생명의 격렬한 투쟁 과정이라는 가르침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살아남느냐 아니면 죽어 없어지느냐의 싸움을 기록한 책이다. 간혹 죽음이 대수롭지 않다는 이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건 자기 속임수에 불과하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자주 쓰는 ‘존재의 불안’이 무엇인지 살펴보라.

수난주일과 부활주일이 다가온다. 고상하게 표현해서 수난이고 부활이지 쉽게 말하면 죽느냐 사느냐의 마지막 싸움을 하는 기간 아닌가. 그런데 그것들이 왜 중요한가. 사망 티켓을 반납하고 생명의 티켓을 선물 받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명언을 기억하라. 곧, ‘죽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인생의 파도는 높을수록 신나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예수님 그분만이 바로 그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되셨다. 자신은 십자틀에 잔인하게 처형되셨지만 오히려 죽음과 싸워 통쾌하게 승리하셨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예수쟁이들’에게 생명 티켓을 선물로 주셨다.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과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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