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안, 한쪽에 있는 작은 탁자 위에는 하얗고 자그마한 우편 상자 하나가 올려져 있다. 사면의 팔을 위로 쳐들고 무엇이라도 넣어 주는 대로 품어 보겠다는 야무진 결심을 하고 열려 있는 상자를 흐뭇한 마음으로 오가며 바라봤다. 이따가 바쁜 일이 끝나고 나면 상자에 가을을 담아서 사랑하는 친구에게 보낼 것이다. 바로 뒤뜰 감나무에서 딴, 잘 익은 단감을 담아 보내려 한다.

뒤뜰의 단감나무는 집을 막 샀을 때 마음 깊으신 어느 분이 선물로 보내 주셨다. 좁은 뒤뜰인지라 고민하다가 판자 울타리가 닫은 구석에 심어 두었는데 서너 해가 지나자 몇 개 열린 감을 시작으로 해서 사반 세기가 지나는 세월을 등에 업고 해가 더해질수록 셀 수 없이 많은 감들이 달린다.

과일 나무중 감나무 관리만큼 쉬운 게 없는 듯하다. 약 한 번 주지 않아도, 가지 한 번 치거나 특별하게 손질하지 않아도, 있는 듯 없는 듯, 연록색의 싹으로 봄을 알려 주고 여름에는 온통 윤기 자르르한 검푸른 잎으로 뒤란을 장식하고, 밑에 놓여 있는 그네에 진한 그늘까지 만들어 주어서, 어쩌다 낮에 집에 있을 땐 편안한 마음으로 흔들거리며 앉아 있게 해준다.

공상 좋아하는 나는 그네에 앉아서 꼭지보다도 더 작은 귀여운 감에게 언제 자랄 건가, 또 언제 익을 건가, 마음으로 말을 건네기도 한다. 어느 꽃 속에서 꿀을 파느라 날갯짓에 지친 벌새를 쉴 수 있게 가지를 내어주는 감나무에게 그 넉넉함을 칭찬해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고마운 건 감나무 집 딸이었던 시절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다. 지금은 증손까지 본 우리 큰언니가 예닐곱 살 때 감나무 묘목을 심으시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도와 드렸다고 자랑하는 감나무 밭. 심을 때 거들었다는 언니는 출가하여 덕을 별로 못 봤지만, 집 옆으로 경사져 올라간 작은 동산을 채우고 있는 50여 그루의 감나무가 있는 그곳은, 때를 막론하고 나에게 놀이터가 되어 주었다.

봄이면 추위 때문에 꼼짝없이 갇혀 있던 방안에서 털고 나와 이 나무 저 나무에 올라가도, 감나무들 주위를 돌면서 서툴게 춤을 추어도, 크게 소리 질러 노래를 불러도 간섭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노래를 못해서 사람 앞에서 주눅들곤 했지만 그곳에서는 음정, 박자도 무시한 채 나만 즐거우면 괜찮았다. 바람에 움직이는 파란 잎들은 잘한다고 박수까지 보내 주었고, 연노란 작은 감꽃들은 실로 묶여 목을 돌아서 가슴에까지 내려와 흔들리는 훈장이 되어 주었다. 작은 망아지가 되어 뛰어다니던 그때가 눈 감으면 손에 잡힐 듯하다.

여름, 간식거리가 궁했던 그 시절 밤 사이에 떨어진 풋감을 물에 하룻밤 우려 놓으면 누구의 입으로 들어간지 모르게 없어져 버렸다. 나무에서 설익은 감이 어쩌다 홍시라도 되어서 붉은 빛이 조금만 보이면 간짓대로 어떻게 해서라도 기어코 따먹었던 기억과 감잎 어디에 숨어 있던 쐐기에 쏘여서 따갑고 가렵고 퉁퉁 부어오른 팔을 붙들고 울고 있으면 된장을 바르며 걱정해 주시던 어머니의 얼굴까지 떠오른다.

가을에는 또 얼마나 풍성했던가! 감잎들을 모두 떨구고 붉고 큰 감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삼아 자태를 뽐내고 있을 때면 나는 감나무 집 딸이라는 자랑과 기쁨이 최고에 달했다. 하얀 눈을 가지마다 소복이 덮고 까치밥으로 남긴 빨간 감들이 눈 속에서 점으로 나타날 때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렇게 올해도 감나무 밑에서 풋감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어가며 놀아 준 것밖에 없는데 감이 익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무거웠는지 가지가 땅을 굽어 보고 있다. 눈짐작으로 실히 천 개도 넘는 열매를 달고 있는 듯했다.

뒤뜰 구석, 작은 공간을 제공했을 뿐인 주인에게 감나무는 많은 것을 주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이따가 팔 벌리고 있는 상자에 가득 넣어 친구에게 보낼 것이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우체국으로 가는 마음 또한 무엇에 비길까! 꼭 마음의 손을 뻗어서 그의 손을 잡는 심정으로 들뜨기 일쑤다. 보낸 후에는 잘 갈 수 있을까. 도착할 때까지 이삼 일 동안 흐뭇한 마음은 끝이 없을 것이다,

나보다 내가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알고 있는 내 친구는 전화를 하여 "감들이 이렇게 예쁜 것을 보니 날마다 감하고 놀았지. 다 자기 닮았잖아!"라며 재치 있는 말로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감나무가 주는 행복이 몇 천 마일 떨어진, 대륙 건너의 친구에게 행복을 만들어 주고, 난 그 친구가 행복해 하는 걸로 또 행복해질 것이다. 집에 가면 열 일 제쳐놓고 감나무를 쓰다듬으며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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