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알고 있는 생각을 바꾸는 일은 처음 이해시키는 일보다 몇 배나 더 힘들다는 것을 많은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다. 그래서 순수한 마음에는 가르쳐 주는 것들이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잘 흡수된다. 가르치는 사람이 한결 쉽다.

세 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도 순수한 때 받았던 교육이 그 사람의 성품을 평생 동안 잡아 주는 역할을 하기에 나온 듯하다. 때문에 유아교육과 초등학교 시절의 교육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귀하고 중하기만 하다.

내 어린 시절, 역사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였으니, 4학년 아니면 5학년쯤 되었으리라. 그때의 담임 선생님께서는 삼국시대를 가르치시면서 신라를 몹시 싫어하셨다. 아예 신라가 나오면 진저리를 치셨다. 당연히 나도 선생님을 따라 신라를 싫어하게 되었다. 싫어하는 정도가 그 선생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다가 역사는 싫어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신라의 장점과 업적들을 다른 선생님들을 통하여 배우면서 싫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차츰 그 감정이 없어진 것 같았는데 지금도 가끔 신라 하면 이유도 없이 싫은 느낌이 드는 걸 보면 처음 배울 때의 그 감정이 무의식 속 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선생님의 감정에 의하여 주입식으로 넣어졌던 지식도 그러할진대, 교육 받는 자가 공감하고 이해하여 결론을 맺으면 그것을 고치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어떤 이는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보다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 더 무섭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책을 단 한 권만 읽은 사람은 그 책의 모든 것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어떤 사상으로도 굳어지지 않은 깨끗한 마음을 한 권의 책 속에 담겨 있는 사상이 고스란히 지배해 버릴 테고, 세상을 두루 섭렵할 수 없으니 그 책 속에 들어 있는 사상과 판단으로 고집을 부리며 자신만의 잣대를 만들 테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읽은 책이 양서가 아닐 경우는 생각하기도 싫어진다.

노인들의 잔소리도 경험에 의해 얻어진 것에 대해 확신을 갖고 다른 이에게 알려 주려 하기에 생기는 현상이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맞지 않을 경우도 있음을 알고 늘 배우는 자세로 있는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는다고 어떤 이는 말했다.

세 돌을 막 지낸 귀여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보통의 세 살배기보다  말이 어눌해서 엄마 아빠를 겨우 부르고 혼자만의 사투리로 의사 표현을 했는데 어느 날 주유소를 보고 "카(car) 꼴레꼴레꼴레" 하며 혼자 기뻐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했지만, 곧 가스가 차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따라해 보고는. 주유소의 이름을 '카 꼴레꼴레꼴레'라고 스스로 이름지은 것을 기뻐한다는 것을 엄마는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말이 늦게 터지는 아이가 걱정이었던 엄마는 그런 의성어를 만든 아이가 귀엽고 기특했지만, 바른 말을 가르치고 싶어서 전에 사촌형이 하던 말을 기억해내어 “형아는 너 만할 때 차 꼴레꼴레라 하지 않고 차 맘마라고 했단다.” 라는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차 맘마가 주유소를 훨씬 쉽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단어라고 엄마는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말이 끝나자 꼬맹이는 의아한 눈으로 엄마를 살펴보다가, 갑자기 한 손으로 입을 막고 한 손으론 배꼽을 움켜잡고는 “으아아하! 껑아! 카 꼴레꼴레꼴레. 차 맘마 아하하하!” 하면서, 카 꼴레꼴레도 모르고 차 맘마라고 하는 사촌형의 말이 웃긴다는 듯 자지러지게 너털웃음을 웃더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몇 번을 계속해서…

아이고머니나! 녀석도 어느새 고정관념을 지닌 애늙은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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