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에 성숙한 신앙인의 특징에 대한 설문의 결과를 요약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첫째,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 둘째, 예수님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있고 감사하는 사람. 셋째,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는 사람. 넷째, 기도와 성경연구, 예배 참석을 통해 영적 성장을 위해 계속 노력하는 사람. 다섯째, 신앙공동체 속에 들어가 동료의 영적 성장을 위해 애쓰는 사람. 여섯째, 인종, 성별, 계급을 초월하여 이웃의 행복을 위해 책임감을 갖고 노력하는 사람. 일곱째, 사회 정의를 위하여 사명감을 갖고 노력하는 사람. 여덟째, 사랑을 삶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

이러한 항목들을 읽다보니, 일반 사람들은 신앙적인 열정과 사회적인 책임감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성숙한 신앙생활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기준으로 영적인 성숙의 정도를 체크하면, 한인 크리스천은 지금 어느 수준에 와 있는 걸까? 한국 교회는?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의 두 제자를 보내어 물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세례 요한은 이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확신했지만 본인에게서 좀 더 분명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 제자들을 보냈을 것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은 “너희가 듣고 본 바를 요한에게 고하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말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보고 그 답을 얻으라고 한다. 예수님 존재 자체에서 뿜어나오는 생명력을 보고 깨달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거침없고 당당한 모습이 왜 이렇게 감동이 되고, 내 가슴을 뛰게 하는지.

진리의 힘은 곧 침묵의 힘

예수님은 왜 이렇게 대답했을까? 진리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뭔가 말이 길어지고 설명이 길어지는 것은 그 존재가 가지는 힘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때때로 진리의 힘은 곧 침묵의 힘이다. 신앙은 언제나 현상적인 설명이나 논리적인 설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요구한다. 우리가 직면하는 궁극적인 문제는 곧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울에게도 예수님과 같은 당당함이 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라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바울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그분을 향한 복음에의 헌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런 당당함과 복음의 열정이 초대교회를 일군 바울의 힘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내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누군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는 다면, “나를 보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이 경고의 메시지처럼 들린다.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예수님이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율법 수호에 열심이었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이었다. 예수께서 때로는 의도적으로 안식일과 정결례와 같은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연한 규범으로 살아왔던 정통성에 도전한 것이었다. 물론 예수님은 율법을 더 온전하게 회복하고자 했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이었다. 바울도 예수님을 율법의 걸림돌로 생각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했다. 이와 같이 율법과 전통에 갇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이 되었다.

둘째, 성전체제를 유지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원했던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이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쫒았기 때문이다. 예배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를 원하는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이었다.

셋째, 유대 지도자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통해서 행정적으로 유대를 무리 없이 통치하기를 원했던 빌라도에게도 예수님은 걸림돌이었다. 예수님의 삶과 정신이 당시의 지배 세력이었던 바리새인 및 사두개인들과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넷째, 민족의 독립을 원했던 열혈당원들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이었다. 예수님의 생각은 민족의 한계를 초월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수께 몰려든 군중들에게도 예수님은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몰려든 군중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유대 군중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다.

이들 모두에게 나타나는 한 가지 공통점은 자신들의 기대치와 예수님이 요구하는 삶이 갈등을 일으켰을 때 예수님을 걸림돌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니 내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정직하게 바라보게 된다. ‘내 삶의 어떤 영역에서 예수님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가?’하고 물었을 때에, 때로는 기도 중에도 예수님은 걸림돌이 되었으며,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예수님이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 자신의 의지가 강해질수록, 내가 원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예수님은 예배 가운데서도, 기도 가운데서도, 심지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서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우리가 원하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을 때 얼마나 많은 실망을 하고, 믿음이 흔들렸던가! 우리네 인생이 예상치 못한 곤경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묻지 않았던가?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이 대치되었을 때 내심 영적인 것을 신앙의 걸림돌들로 생각하지 않았던가!

솔직히 신앙의 영역에서도 예수님이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한계와 죄성을 바라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사건은 믿음의 걸림돌이 된다. 고차원적이고 도덕적인 강론을 듣고, 종교에 대한 자신의 지적인 능력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우리도 제자들과 같지는 않은가?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삶, 그 거침없고 당당한 삶으로 우리를 몰아붙이고 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