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 팔팔 이삼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십구 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 일 앓은 후 죽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우스개로 하는 말이지만 그 안에는 오래 살고 싶어 하는 마음,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 질병으로 고생하고 싶지 않은 마음 그리고 가족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 등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잘 사는 것 만큼 잘 죽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니 잘 죽는 사람이 잘 산 사람일 것입니다. 최근에 저는 한 권사님의 감동적인 마지막 길을 지켜볼 수 있는 복을 누렸습니다. 92세의 인생을 살다가 가신 그분의 삶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의 삶과 죽음이 감동적이라고 느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그분은 주님 안에서 사셨고 주님 안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남편이 먼저 떠난 탓에 일찍 혼자가 되셨지만 신앙은 그분 삶의 기초였고 소망이었습니다. 자녀들은 여전히 서운하겠지만, 그래도 90세 이상 사셨다면 결코 짧은 인생은 아닐 것입니다.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ESPN과 CNN을 즐기실 정도로 건강하고 적극적으로 사셨습니다. 폐암이 원인이 되어 돌아가셨지만 생존기간에 대한 의학적 소견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시기 몇일 전까지 기운이 약해지셨다는 것 외에는 큰 고통이 없으셨습니다.

더 의미있는 것은 믿음의 가문을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손주들 가족까지 모든 자녀들이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존경을 굳이 구분한다고 볼 때 부모를 사랑한다고 해서 존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분의 자녀들은 모두 어머니를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형제들끼리 우애가 돈독했습니다. 돌아가시기 몇일 전에는 네 자녀들이 다 모여 어머니와 함께 예배드리고 어머니는 자녀를 축복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손자들이 타주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찾아와 하루나 이틀을 함께 보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2세들에게 보기 쉽지 않은 모습입니다.

심방하는 목회자에게는 믿음과 구원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하셨습니다. 제게는 꿈과 환상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바로 하늘나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표정이 얼마나 밝고 소망이 가득했는지 오히려 제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심방 받은 그 다음날 아침 사랑하는 큰 아들의 품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집례는 20여 년 이상 목양의 관계로 사랑을 나누던 목사님의 인도로 이루어졌고 자녀들이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들과 교우들이 환송해 주었습니다. 하관을 마치고 유족들은 별도의 리셉션 장소를 준비했습니다. 거기에는 돌아가신 분이 취미로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노래, 어머니를 위한 노래,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어떤 인생의 성공도 가정의 실패를 대신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은 그만큼 소중합니다. 최근 한국의 선거에서 어느 후보들의 당락이 바뀐 것은 자녀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자녀를 낳아 잘 기르는 일, 자녀들에게 존경받는 부모가 되는 일이야말로 잘 사는 인생, 잘 죽는 인생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가정을 행복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꾸려갔다면 그분은 정말 칭찬받을 만합니다. 역사책에 나올 만큼 유명한 삶을 살지는 않았어도 위대한 인생의 주인공은 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살다가 주 안에서 죽는다면 분명 위대한 삶입니다. 자녀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자녀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 또한 위대합니다. 무엇보다도 훌륭하게 장성한 자녀들을 이 땅에 남겼고, 그들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떠날 수 있다면 이또한 위대한 일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오늘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요즘 제게 묻는다면 잘 죽는 준비를 하는 날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