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중세의 교회 (4)

V. 국가의 지배를 받게 되는 교회 (2)

4. 교황권의 확장 (2)

2) 힐데브란트(그레고리 7세)

클루니 개혁당의 지도자인 힐데브란트는 24년 동안 6인의 교황의 배후 실력자였으며, 1059년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서 교황으로 선택되어 그레고리 7세가 되었다.

그는 황제 헨리 4세와 서임권에 대한 격렬한 싸움을 벌여서 독일 제후들의 동조를 얻어 헨리 4세를 파문하였고, 카놋사 성에서 맨발로 3일 동안 용서를 빌었던 헨리 4세에게 용서를 베풀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어 후에 독일 제후들은 헨리 4세에 동조하였다. 그레고리 7세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헨리 4세는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로마를 포위하고 탈취하였으며, 그레고리 7세는 로마에서 도망하여 노르만족에게 몸을 의탁하였으나 1085년 살로르 노상에서 실의 속에 죽었다.

3) 보름스 협약(The Concordat of Worms)

그레고리 7세 사후에도 서임권 논쟁은 약 35년간 계속되다가 1122년 보름스에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타협이었다. 교황들은 신권으로 감독을 선출했고, 황제들은 왕권의 행사로 감독들에게 봉건재산권을 주었다.

VI. 십자군

1. 의미

십자군 운동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서부 유럽의 군대가 빼앗긴 성지를 마호멧 교도인 터어키인들로부터 회수하기 위하여 1096년에서 1270년 사이에 일으켰던 원정대라 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이교적인 백성과 이단자들에게 대항한 교회의 합동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십자군 운동은 유럽 역사에 있어서 가장 극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 중의 하나였다. 이 십자군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름 밑에서 거룩한 목적으로 싸움을 한 군대들이었다.

2. 은둔자 피터와 교황 우르반 2세

기독교 순례자들은 4세기초 콘스탄틴 이후로 늘 성지를 순례하였다. 그러나 그 후 터어키인들이 11세기에 이 성지를 점령하게 된 이후에는 형세가 전연 달라졌다. 이들은 기독교 신자들을 모욕하고 심지어는 죽이기도 하였다. 이때에 은둔자 피터(Peter)는 성지를 순례하고 팔레스타인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를 목격하고 분이 치밀었다. 그는 유럽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이교도들에 대항할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고 역설한 결과 이 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그리하여 1095년에 크럴몬드 회의에서는 교황 우르반 2세가 십자군을 승인하고 이를 위하여 축복하였다.

3. 십자군 전쟁

십자군은 1096년 처음으로 20만명 규모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났다. 마침내 1097년 7월 15일에 예루살렘을 함락하여 기독교 왕국을 세웠다. 이때에 많은 회교도들이 참살을 당했다.

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위협하자(1147-1149), 성 버나드의 선동으로 프랑스와 독일 왕 그리고 영국의 사자왕 리차드까지 호응하여 제 2차 출전을 했으나, 소아시아에서 강적 터키 군에게 패하고 분산하여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에 회교도들의 자체 내란으로 예루살렘 왕국을 얼마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4.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그 교훈

십자군 싸움은 제8차까지 지속되었다. 1212년에는 3만여 명의 소년소녀가 성지로 향했으나 중도에서 참혹하게 죽고, 사로잡혀 가고, 유리하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의 원인은 처음의 목적을 잃고 또 종교열도 식고 오합지졸로 재물을 약탈하고 불순행동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이 남긴 역사적 교훈은 “교회는 땅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개인의 심령을 점령하는 것이다” 이었다. 성도를 탈환한다는 명목으로 일으킨 십자군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나면서 이슬람의 기독교에 대한 끝없는 원한만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5. 십자군 전쟁의 결과

그러나 이 전쟁의 결과는 유럽제국의 단결을 촉구했고 기독교국의 의식을 환기시켰으며, 서방으로 진출하려는 회교의 세력을 막았고, 무사도의 발달로 일반인의 감정을 완화시켰다.

또 봉건제도의 붕괴로 새로운 종교의 기운이 촉진되었고, 동서방 간의 문화교류로 지식의 부흥이 일어났고, 해운업이 발달하여 상공업이 번영하고 로마 교회의 재정적인 면에서 수입이 증가하였다.

VII. 교황권의 성쇠

1. 교황권의 절정

교회는 인노센트 3세(1198-1216) 치하에서 최고의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국왕은 교황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하였다. 프랑스와 다른 나라들에는 인노센트 교황과 싸울 만한 사람이 없었다. 영국 왕 존 레클란드를 파문하여 항복을 받았다. 왕의 세입에서 1,000마르크를 매년 내게 했다. 영국은 스스로 교황의 신하임을 인정하였고 또 다른 황제와 모든 유럽의 제후들이 교황을 영적 주로서 승인하였다. 한때는 동로마 제국까지도 로마교회의 봉토가 되었다.

1215년 로마의 라테란 교회에서 교황권의 전체적 회의를 열었다. 성지 회복과 교회의 개혁을 선포하였으며, 왈도교도(Waldensian)와 알비교도(Albigensian)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2. 교황권의 쇠퇴

1) 보니페이스 8세

로마 교회(교황권)는 보니페이스 8세(1294-1303 재위)때에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려 깊은 학자였지만 거만하고 오만한 사람이었다. 교황은 여러 가지 교서(Bulla)를 발표하여 교황의 권위와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교황은 프랑스 황제 필립을 파문하였으나 귀족들은 왕을 옹호하고 교황을 저버렸다. 1303년, 황제의 군대에게 이탈리아의 아나그니(Anagni)에서 모욕을 당한 87세의 교황은 로마에 돌아가 며칠 후에 사망하였다.

2) 바빌론 유수(1309-1376)

1309년 교황의 주재처가 로마로부터 프랑스의 아비뇽(Avignon)으로 옮겨졌다. 이 시대에는 교황들이 프랑스 황제의 주관 하에 있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동안 바빌론에 포로가 된 것과 같다고 하여 바빌론 유수라 불려진다.

아비뇽에 있는 동안 교황들은 매우 사치스러운 궁정 생활을 유지하였으므로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래서 교황들은 돈을 벌기에 뻔뻔스러울 정도였고 가장 추한 방법은 감독의 직분과 면죄부(Indulgence)를 팔았으며 신자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강요했다.

이탈리아인들은 교황들이 아비뇽에 주재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고 다시금 로마가 교황의 주재처가 되기를 원했다. 1378년 공식적으로 각 파에서 한 사람씩의 교황을 선출하여 두 사람의 교황이 되었고 이것이 대분열(1378-1417)이라고 불리어진다. 1409년에 분열을 치유하고자 피사(Pisa)에서 종교회의가 개최되어 교황을 모두 물러나게 하고 새 교황 알렉산더 5세를 선출하였다. 이것으로 교황은 3명이 된 것이다.

* 편집자 주 : 이학진 장로는 교회 안팎에서 말씀 인도자로 사역하고 있다. 성경 교재인 『성경 통독과 이해를 위한 싹 난 지팡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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