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중세의 교회 (6)

VIII. 문예부흥(르네상스 : Renaissance)기의 기독교 문화(2)

3. 문예부흥기의 기독교 예술(3)

문학에서는 단테(1265-1321)가 『신곡(The Divine Comedy)』 을 저술하였는데, 정신적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였다. 페트라르카(1304-1374)는 고대 로마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부터 르네상스의 고전 부흥 운동이 시작되었다.

보카치오(1313-1375)는 저서 『데카메론(The Decameron)』에서 유럽 전 인구의 오분의 일 이상이 페스트로 희생되었다고 적고 있으며 이 데카메론은 유럽 최초의 근대소설로 평가된다.

음악의 분야에는 교황 그레고리 1세(590-604 교황 재위)가 교회 음악 전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이런 일반적이고 신비적이며 내세적인 음악은 그레고리 성가 혹은 무반주 성가, 단선율 성가라 불린다. 오타비아노 페트루치(1466-1539)는 1501년에 최초로 수동으로 찍은 악보를 출판하였고 이 시대에 비로소 관현악의 작곡 기능이 개발되었다.

D. 근세의 교회

I. 종교 개혁 시대

1. 종교개혁의 여명

종교개혁은 여러 세기 동안 종교적인 불만과 사회적인 불안 및 소란이 쌓이고 쌓였다가 일어났다. 하지만 교황과 교회의 직분자들은 교회의 개혁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문예부흥 정신은 생각의 중심이 하나님에서 사람으로 옮겨가게 하였으며,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기본적인 정신 토대를 제공하였다. 또한 인식의 각성은 기존의 종교의 틀에 부딪치므로 1600년대의 처절한 유럽의 종교전쟁을 야기하게 되었다.

암흑시대인 중세로부터 각성은 남부 유럽에서 문예부흥(14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일어난 학술, 예술상의 혁신운동)으로 시작되어 급속히 북방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시대인 15세기와 16세기의 유럽의 정치계는 불안과 소란 중에 있었다. 특히 독일에 있어서의 직접적인 종교개혁의 원인 중 하나는 교황청에서 로마에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한 재정을 마련하는 면죄부 매매였다.

백성들은 지은 죄의 형벌을 면하기 위해 많은 돈을 내놓았다. 고행 대신에 재물을 바치게 하고 돈만 내면 연옥에도 가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각처에서 이 악폐는 성행되었고, 이것은 루터가 크게 격분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루터를 도구로 쓰셔서 교회에 혁신 운동이 일어나게 하셨다.

2. 마틴 루터

마틴 루터는 중부 독일에 있는 아이슬레벤에서 1483년 11월 10일에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루터는 18세에 유명한 얼푸르트 대학생이 되었다. 그는 졸업 후에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아우구스티누스파는 규칙이 엄격하고, 신학 지식을 함양하는 데 가장 좋은 수도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마침내 루터는 수도사가 되었고, 1507년에는 신부가 되었고, 1508년에는 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루터는 1510년 로마로 파견되어 고행을 하며 스칼라 산타(Scala Santa)의 28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로마서 1장 17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이 그의 귀를 울렸다. 이것이 그의 회심의 시초였으며 1512년 신부 겸 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 시절 그의 거처에서 바울의 서신을 연구하던 중에 위의 말씀으로 영혼의 짐을 벗었다. 고행으로는 마음의 평안과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즉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위텐베르크 대학교 정문에다 교황에게 공개적으로 토의하고자 하는 제목 95개조를 내걸었다. 그때에 공개 토론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그것은 널리 퍼져나갔다. 그가 내건 주장의 골자를 살펴보면,
1) 사람은 선행의 어떤 공로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고 구원을 얻는다.
2) 성경은 믿음과 생활을 위한 유일한 표준적인 권위이다.
3) 면죄부는 죄를 사할 수 없다
4) 연옥에 있는 영혼에게는 면죄부가 무효이다.
5) 전승(傳承)은 성경에 기초를 둔 것만이 가치가 있다.

이상으로 인하여 1520년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그 후 그는 윔스회의에 호출되었을 때, 친구들의 만류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회의에 참석하여 자기의 주장을 피력하였다. 그는 154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종교개혁의 활동을 굽히지 않고 계속하였다.
그는 종교개혁의 삼대 논문인
1) 기독교 귀족들에게 2) 교회의 바벨론 유수 3) 기독신자의 자유를 발표하였으며 교리 문답서 등을 완성하였다.

루터는 많은 찬송시를 썼고, 특히 ‘내 주는 강한 성이요’(A Mighty Fortress is Our God)는 지금까지도 널리 불린다.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현대 독일어의 기초를 확립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가져왔다.

1525년 6월 13일, 루터는 특별한 조력자를 얻었다. 수녀인 캐더린 본 보라(Catherin Von Bora)와 결혼하여 종교개혁운동은 또 다른 계단을 밟게 된다.

루터는 처음에 르네상스 전통의 상속자들인 많은 독일 인문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신적인 면의 루터와 인간적인 면의 인문주의자들과의 차이는 점점 커져 갔는데 그 예는 루터와 에라스무스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기독교 윤리에 바탕을 둔 에라스무스가 사람들에게 죄에서 돌아설 것을 촉구했을 때 루터는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이것은 고대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자를 도우신다’는 것이었다.

루터의 개혁운동의 영향으로 독일에서 종교 개혁의 둘째 세대인 마틴 캠니츠에 의하여 루터란 신학이 확고해졌고 그 발상지인 독일 밖으로 멀리 퍼졌으며 이 운동은 츠빙글리, 칼빈, 존 낙스 및 그 밖의 사람들을 통하여 유럽 각지로 더욱 넓게 퍼지게 되었고, 스칸디나비아의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랜드, 스웨덴 등지로 들어갔다.

3. 존 칼빈(John Calvin)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파리의 동북부에 있는 노용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법률가였으며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였다. 칼빈은 성직록으로 14세에 파리 대학에 들어가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올린스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아버지가 사망한 후 인문대학에서 본인의 희망대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 편집자 주 : 이학진 장로는 교회 안팎에서 말씀 인도자로 사역하고 있다. 성경 교재인 『성경 통독과 이해를 위한 싹 난 지팡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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