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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의 <Room of Marvels>를 읽었습니다. 번역본도 없고 서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도 없었는데, 미국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달라스 윌라드가 자신의 저서에서 추천했던 책이라 하여 호기심에 빌려서 읽었습니다. 영어의 문외한이 사전도 없이 대충 읽었으니 문장들을 제대로 해석도 못했을 텐데 이상하게 여운이 깁니다.

이 책은 소설입니다. 주인공팀 허드슨이 성공회 수도원에 며칠 머물면서 꿈속에 천국을 다녀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 여행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가정과 사회로 복귀하는 이야기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소설은 소설이되 등장인물은 모두가 이름만 바꾼 실제 인물들이랍니다. 심장 기형을 안고 태어난 두 살짜리 딸과 절친한 친구와 어머니를 몇 달 간격을 두고 줄줄이 잃은 저자는 상실의 고통이 너무 커서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서 수도원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설정하게 되었고 천국 여행을 떠나면서 날마다 그 공간에서 사랑했던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 대화가 소설이 된 것입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소설로 잘 풀어냈다고 평했습니다.

주인공의 상담을 맡았던 수사는 침묵의 수도원에 왔으니 무조건 쉬라고 충고합니다. 아무 생각이나 노력도 하지 말고, 그저 강가를 거닐고, 정원에 앉거나 심호흡을 하면서 느려지라고 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되라고 말해 줍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셋이나 잃고 좌절에 빠져 있던 주인공은 고요한 환경 덕분에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그리고 둘째날 밤, 너무도 선명해서 꿈이라 여겨지지 않는 꿈을 꿉니다. 주인공이 파자마 차림으로 기차를 타고 오두막에 도착하면서 천국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어릴 적에 머리칼을 잘라 주었던 이발사 에르니, 평소에 존경했던 기독교 작가 C. S. 루이스(천국에선 잭으로 불립니다.), 말하는 말, 단짝 친구 웨인, 지상에서 만난 본 적 없는 증조할머니 셀리아,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한 식당에서 같이 일했던 토미, 할아버지 해리스, 엄마, 딸 매디슨,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느껴지고 체험되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주인공에게 왜 이발사 에르니가 맨처음 나타났을까요? 그는 손님들에게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밝힌 적은 없지만, 머리를 자르면서 손님들을 위해 일일이 기도했다고 말해 줍니다. 천국에서는 소리 없이 드린 기도 한 마디도 소홀히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두막에는 거울이 있습니다. 주인공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거울입니다. 얼핏 바라본 주인공은 깊은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좀더 깊숙이 들여다 본 주인공은 심한 수치심을 느낍니다. 속사람이 적나라하게 보입니다. 천국에서 만난 이들에게도 거울에게도 체면치레나 위장이나 거짓은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에르니와 잭은 고통스러워하는 나, 자기 의에 사로잡혀 고통까지 통제하려 드는 나, 자신은 물론 하나님까지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상기시켜 줍니다. 주인공의 슬픔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도 보여 줍니다. 주인공이 속속들이 회개하도록 도와 줍니다.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불완전하고 엉터리고 가짜인지를 인정하자 그제야 진정한 용서도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때 자녀가 기도하는 순간 너머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의 영원한 효과를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원한다는 이유로 우리의 소원을 다 들어 준다면, 그건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수중에 넘겨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일일이 들어 주는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악마보다 더 악한 존재일 것입니다.”라는 조언도 합니다. 솔직하게 기도하되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인가요?

친구 웨인은 주인공이 마스크와 지휘봉을 없앨 수 있게 도와 줍니다. 가면은 처세를, 지휘봉은 조종을 상징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진짜(속사람)보다 더 진짜처럼 여기게 된 가짜 얼굴(겉사람)과 무언가의 성취를 위해 끊임없이 나와 이웃을 조종하려드는 지휘봉을 떨쳐내지 않으면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가면과 지휘봉에 집착하는 한 두려움도 불안도 고통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마스크를 불의 제단에 던지려 하자, 주인공의 얼굴과 너무 똑같은 그 얼굴이 외칩니다. 나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두렵지 않느냐고... 공포에 사로잡힌 주인공은 죽을 힘을 다해 마스크를 불 속에 던집니다. 지휘봉은 주인공이 세상에서 느끼는 두려움(fear)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말(말하는 말)을 거꾸로 타고 가는 동안 어느결에 사라져 버립니다. 말을 거꾸로 타는 건 삶 혹은 두려움의 고삐를 주인공이 쥐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는 자세를 뜻한다고 했지요. 그렇게 주님이 주인공을 위해 천국에 마련해 두신 ‘room of marvels'를 향해 가는 동안, 걸치고 있던 스웨터의 죄를 상징하던 잿빛은 하얗게 변하고 주인공의 그림자도 사라집니다. 천국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몸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 자체가 marvel, 경이요 놀라움입니다.(저는 경이나 경탄이란 한자어보다 그냥 놀라움이란 한글을 택하렵니다.)

도서관의 낡은 신문 기사에서 그 존재를 확인한 것이 전부였던 증조할머니 셀리아를 만납니다. 경건한 퀘이커 교도 집안 출신의 그녀가 자살했다는 지역신문 기사에 놀랐던 주인공은 그녀가 천국에 있어서 더 놀랍니다.(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기에 저자는 이 부분을 기록하면서 마음이 가장 무거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에 대한 보다 강력한 간증을 위해, 우리 최악의 죄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싶어서 그녀를 천국에 등장시켰다고 합니다) “천국은 주인공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은혜가 넘치는 곳”이라면서, 증조할머니는 천국에서 만나는 이들 가운데 주인공을 가르치기 위해 찾아오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녀 자신을 위해, 그리고 증손자에게 감사하고 축하하기 위해 왔으며, 그녀의 일부가 주인공 안에 들어 있어 자랑스럽다고 말합니다. 간질 증세가 심해가는 와중에 태어난 넷째아이가 장애아여서 절망에 빠진 그녀는 죽음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지만, 증손자인 주인공은 최악의 순간에도 기도하고 고함칠망정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놀라움의 방에는 야구공이 놓여 있습니다. 대학생 시절 학비에 보태려고 아르바이트하던 식당에서 같이 일한 토미가 나타납니다. 잘 웃던 토미는 고아원 출신의 가난한 청년이었습니다. 주인공과 토미의 유일한 공통점은 양키즈 팬이라는 것이었지요. 가난 때문에 야구장 근처도 못 가고 라디오로만 야구 중계를 들을 수 있었던 토미에게 주인공은 경기장에서 얻은 홈런 볼을 준 적이 있습니다. 홈런 볼을 손으로 직접 받은 것도 아니고 서로들 공을 차지하려고 구경꾼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에 야구장 종업원의 실수로 주인공의 컵에 들어온 것이며, 토미에게 선뜻 주고 싶었던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자, 토미는 자신에게는 그 공이 너무나 소중했다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주인공을 통해 들어주신 것이라 말합니다. 아니? 주인공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던 일이 토미에게는 그렇게도 중요했다고?? 하나님은 그 소원도 놓치지 않으셨다구요?

주인공이 네 살적에 죽은 할아버지가 잔디밭에서 체스를 두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뒤부터 체스를 절대로 하지 않는 주인공에게 체스 한 판 두자 합니다. 할아버지도 기독교인이셨어요? 생전에 교회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주인공이 놀라서 묻습니다. 증조할머니가 죽은 뒤 가난한 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를 고아원에 맡겼는데, 그곳에서 그를 돌보아 준 에이미의 영향으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교회를 짓고, 봉사하는 일들이 즐거웠다고 말해 줍니다. 그런데 작은 교회의 남자 신도 절반이 흡연을 했다나요. 어느 날 교회 뒷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여자 권사님들에게 들켰답니다. 너무 놀라 피던 담배를 주머니에 넣었다가 화상을 입을 뻔했답니다. 이들은 남자 신도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할아버지의 흡연을 문제 삼아 집사직 박탈을 주장했고, 내성적이었던 할아버지는 교회를 나오고 말았답니다. 할머니가 그 교회를 사랑했기에 다른 교회로 옮길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신자들의 정죄와 위선이 싫었다면서 “I wanted to show you that heaven is big enough to include people that don't fit the mold"라고 말합니다. ”God's love is greater than we could ever imagine or dream"이라고도 말합니다.

이제 어머니, 그리운 엄마를 만납니다. 가장 완전해 보여서 북극성처럼 여겼고, 엄마가 죽자 갑자기 방향을 잃은 것 같았다는 주인공에게 엄마는 오히려 완벽을 지향하는 마음 때문에 천국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엄마는 ‘놀라움의 방’ 벽에 걸린 1인치짜리 사진틀들을 가리킵니다. 그 중 하나에 손을 대니 동영상이 나타납니다. 지난 날 주인공의 삶 속에 들어왔던 사람들과 얽힌 일들이 영화처럼 상영되고, 모두들 주인공 때문에 행복했고 고마웠다고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이미 아스라한 추억이 되어 버린, 크고 작은 사랑 나눔들이 놀라움의 방 벽에 빠짐없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일부이며 그들도 우리의 일부”라면서 엄마는 앞으로도 나를 위한 ‘놀라움의 방’ 벽에 1인치짜리 사진이 끝없이 붙여질 것이라 말합니다. 머리털 하나까지 헤아리시는 주님은 내 삶의 모든 것을 잊지 않으신답니다.

마침내 너무나 보고 싶었던 딸 매디슨과 해후합니다. 천국에서의 그녀는 두 살이 아닙니다. 두 발로 사뿐사뿐 춤을 추는 해맑은 어린이의 모습입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천국에 올 수 있었겠어요?”라면서 감사를 표하는 매디슨은 아빠에게 부탁합니다. “When you pray, just tell God what you want, And let him decide how to answer it" 그녀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그녀를 살리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점점 더 강하게 드러났다면서 ”God's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잘 있어요.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살아요. 하나님은 항상 당신을 사랑해요” 주인공은 훗날을 기약하며 기쁘게 그들 모두와 헤어집니다.

잠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득달같이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에게 꿈은 꿈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약속이자 삶의 희망이었지요. 사랑했던 이들은 죽음 뒤의 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 안에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사랑의 릴레이는 끝날 수 없는 것이지요.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고 주인공 부부는 임신을 합니다. 건강한 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부부는 동시에 그 아이의 이름은 “희망‘이라고 외칩니다.

대화들이 참말 아름답습니다. 길지 않은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았습니다. 여기저기 유머 감각이 돋보였는데, 그것까지 옮길 자신은 없네요. 교리책보다, 천국 다녀왔다는 이들의 간증보다 저는 소설 속의 천국이 더 실감났습니다. 그 동안 천국에 대한 설왕설래들이 혼란스럽게 여겨져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으려고 천국에 대한 즐거운 상상을 스스로 금지시켜 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릴 적, 기독교가 무언지 모르던 시절에, 세상이 너무 크고 무서워서 수호천사를 상상했지요. 이후 그 수호천사는 정말 나를 지켜 주었지요. 과연 그것이 어린아이의 동화적인 상상뿐이었을까요? 오히려 순수한 신앙의 원형 아니었을까요? 결국 그 수호천사가 하나님을 만나는 징검돌이 되어 준 것 같거든요. 아니 하나님이 당신을 소개하기에 앞서 보내준 천사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두 번쯤 꿈에서 만난 수호천사가 너무도 선명해 꿈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소원했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어느 과학자는 생명 단위를 DNA가 아닌 우주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복음적으로 풀면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자연이 다 주님의 지체이고, 이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 생각하면 사랑이 낭만이 아니라는 게 더욱 분명해집니다. 내 생명을 지키고 누리는 그 일이 결국은 네 생명을 지키고 누리는 일이기에 용서와 사랑이 선택사항이 아님도 분명해집니다.

이제는 나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깜짝 수호천사쯤은 될 수 있어야 할 텐데... 사랑은 보여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할 텐데... 아직도 사랑만 받고 싶으니... 에휴, 말을 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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